진리의 조각
진리의 조각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11.15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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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과정이란 소모적인 대가일 뿐이다. 그것은 승자독식의 문화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상식이다. 그 상식이 인간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가치관을 형성한다. 복음이란 바로 이러한 상식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예배 중에 우리가 ‘상식으로부터 해방(liberation from common sense)’되고 '거룩한 광기(holy madness)'를 부리도록 격려하신다.”-로드니 클랩

그렇다. 예배는 우리를 상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시간임과 동시에 거룩한 광기를 부릴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란 얼마나 변질되었는가. 오늘날 예배는 시종일관 구원타령에 매달려 있다.

과거에 나는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했다.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났다.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늘 실감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의 눈을 보면 눈물을 흘린 흔적이 역력했다.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런 예배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런 예배는 백날 드려도 우리를 상식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상식을 강화한다. 그것은 설교자였던 이동원 목사님의 은퇴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분은 자신이 교인들이 상처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다 말하지 못했다는 유감을 표현했다.

결국 은혜 받는 예배란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힐링’이라는 단어나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은 그런 은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였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신실해야 합니다.”(블룸하르트 <더 이상 하늘에 계시지 마시고> 대장간)

블룸하르트 목사의 아버지 역시 목사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대단한 성령운동가였다. 아들 블룸하르트 역시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령운동에 매진했었다. 그러나 성령운동이 가지는 한계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한계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를 일깨워주었다.

하나님 나라를 알게된 그가 드리는 예배의 초점이 달라졌다. 그것이 바로 위의 말에 드러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기는 쉽다. 그동안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늘날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나라가 사라진 변질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교가 거쳐야 할 곳에 도달했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체가 그렇게 되었다. 물론 블룸하르트나 로드니 클랩과 같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다수의 정통 혹은 제도권 그리스도교에 의해 제한을 받거나 이단의 혐의를 짊어져야 했다.

나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때마다 C. S.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탄이 조카인 스크루테이프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사단의 세력의 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조각을 발견했다고 큰일이 났다고 법석을 떠는 조카 스크루테이프에게 사탄은 웃으며 말한다.

“적(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아는 것보다 안전한 때는 없다.”

바로 이런 일이 그리스도교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하고 구원에 천착하는 시간이 사탄에게 가장 안전한 시간이다.

가을이다. 오가는 길에 교회들이 즐비하다. 교회마다 “새 생명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집회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오래도록 교회에 모든 것을 걸어온 나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교회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새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새 생명”이란 단순히 죽은 후에 “천국환송예배”를 드릴 수 있는 빌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말 그대로 “새 생명”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 답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상식에서 해방되어 사회 곳곳에서 거룩한 광기를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런 광기를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기꺼이 만나기를 갈망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모든 인류, 민족, 권세, 능력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더욱이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경험하는 모임이다. 우리가 함께 만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로운 빛 가운데 있는 세상과 일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변한다. 예배가 우리를 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배는 역사의 원동력이다. 그것은 평화를 만드는 엔진이다.”(알렌 크라이더, <평화교회> 고영목 김경중 옮김, 대장간, p.76)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말씀이 없는가. 내게는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나는 위의 알렌 크라이더의 말이 이 말씀의 해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모든 인류, 민족, 권세, 능력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결국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상식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광기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예배가 이런 역할을 못하고 은혜 타령에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탄을 위한 것이 된다. 사탄은 그렇게 눈물 흘리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나는 오늘 평화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결과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것을 샬롬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해왔다. 샬롬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이지만 사람들의 노력 역시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상식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광기를 부릴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소재로 당신의 능력으로 이 땅에 샬롬을 구현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질 것을 믿는다. 그것을 믿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로드니 클랩이 말하는 거룩한 광기이다. 거룩한 광기는 그리스도인들을 죽기까지 신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바로 이 지점이 그리스도인들이 사탄과 결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껏 믿은 후에 진리의 조각을 발견한 것을 기뻐하며 사탄의 영역 안에 안주하는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라. 교회를 다니는 것과 새 생명을 축하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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