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
지푸라기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12.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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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계절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길에서 사는 분들이 걱정이 된다. 그런데 걱정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가증스럽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기도를 하기도 송구하다. 내 할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최소한 기도하는 자의 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시 지푸라기는 이런 내게 위로가 된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 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주님이 그렇게 집을 짓고 계시다고 믿는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물론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그 역할의 의미를 모른다.

왜 주님이 노숙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셔야 할까. 왜 굶주리는 아이로 우리 곁으로 다가오실까.

나는 그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늘 있어야 하는 상황은 분명 주님이 원하시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상황에 우리가 반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임무가 끝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그들은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이다. 그들처럼 길에서 살지 않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가 부자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어제 내가 예전부터 존경하는 한 신부님의 글을 읽었다. 그 신부님은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어려움이라는 말이 내게는 그다지 탐탁지 않게 들린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는 이미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충분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나는 이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것이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이다. 나사로가 죽은 후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이유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 설교를 하는 목사 자신도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아왔을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사는 목사가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것이 지옥행의 이유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런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온갖 호사를 누리는 것이 지옥행의 이유이기는커녕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장만을 거듭해 들었을 뿐이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고苦다. 온갖 호사는 우리의 인생이 苦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호사를 누리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옥행의 이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리석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어 단어 ‘absurd’는 단어는 ‘불합리한’, ‘어리석은’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 단어는 라틴어 ‘surdus'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다. 'surdus’라는 단어의 의미는 ‘듣는다’라는 의미이다. ‘ab’라는 접두사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다. 그러므로 어리석다는 말은 듣지 않는다는 의미다. 듣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렇다면 듣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셨다. 부자들은 듣지 않는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거지 나사로의 기사에서 누가 부자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부자는 나사로가 자신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도 그를 일으켜 자신의 상에서 같이 먹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부자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돈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부자의 기준을 삼으려 한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다른 이의 괴로움을 보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돈이 무서운 이유는 다른 이의 괴로움을 보고도 그것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도록 아예 사람의 뇌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존의 문제 앞에서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미증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그가 가진 돈과 권력이 그의 뇌를 파괴하여 공감의 능력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찬바람이 갑자기 불어와도 자기만 따뜻하면 되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괴로움에 대한 개인의 반응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교회에 헌금을 하거나 누군가 남을 돕는 일에 십시일반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나눔이 없다면 그런 일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나눔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한 척도이다.

주님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단단한 흙벽돌에 집어넣고 당신의 집을 지으신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지푸라기임을 알려주는 정호승 시인이 고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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