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겸과 삭개오
백사겸과 삭개오
  • 김영봉 목사
  • 승인 2023.01.2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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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삭개오' 백사겸 전도사
'조선의 삭개오' 백사겸 전도사

1. 지난 주말에 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연합감리교회의 미래에 대해 같은 고민을 가진 몇몇 목회자들과 시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지역을 Bay Area라고 하더군요. 
 
그 지역에 사시는 분 중에 수 년 전부터 영상으로 우리 교회 예배에 참여한 분이 계십니다. <사귐의 소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하셨구요. 팬데믹 중에는 줌을 통해 수요성경공부에도 참여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교회의 온라인 교인인 셈입니다. 
 
그분이, 제가 Bay Area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조금 일찍 와서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서, 지난 주 화요일에 그곳에 도착하여 목요일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그 기간 내내 Bay Area에는 비가 내려서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화할 시간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개인사를 알아가면서, 특별히 그분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큰 감동과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맹인 전도자 백사겸 선생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교우님은 조심스럽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유튜브와 인터넷에 나와 있는 글을 통해 알아 보니, 그분은 일생 자체가 기적이라 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그분의 손자를 통해 알게 되니, 그 감동과 감화가 특별했습니다. 
 
백사겸 선생은 1860년에 평안남도 평원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위로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이 두 살 때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십니다. 홀로 된 어머니가 간신히 두 아들을 건사하는 중에 여섯 살 때 또 한 번의 불행을 겪습니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은 것입니다. 열 살 때에는 어머니까지 잃습니다. 아무리 박복하다 해도 이럴 수가 있을까요? 
 
고아가 된 형제는 거지로 연명합니다. 형은 앞서 가고 동생은 형이 잡은 막대기를 잡고 뒤따라 가며 밥을 얻어 먹고, 밤이 되면 이슬을 피할 만한 곳에서 잠을 잡니다. 질긴 목숨은 그렇게 세월의 풍상을 이겨냅니다.  
 
몇 년 후, 형이 일을 할 나이가 되자 어느 집에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형은 눈 먼 동생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어느 점술가 집에 동생을 맡깁니다. 당시에 점술가의 80%가 맹인이었다고 합니다.  
 
점술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점’으로, 자신이 섬기는 신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역과 여러 가지의 복술을 습득하여 점을 치는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로 후자에 속합니다.  
 
소년 백사겸을 문하생으로 받은 점술가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가엽게 여겨 수업료도 깎아주고 각별하게 교육시킵니다. 그 소년은 3년 만에 스승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난 점술 실력을 발휘합니다. 소년 백사겸은 스승에게서 독립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며 점을 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명복’ 즉 뛰어난 점술가로 인정받습니다.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큰 부자가 되어 고양읍에 자리를 잡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얻습니다. 
 
2. 그분은 명복으로 존경받으며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삽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두 가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점술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속여먹고 있다는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배워서 하는 점술은 거의 사기술에 가깝습니다. 점을 치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속여 풍요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에 짓눌림을 느꼈습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배운 사기술 말고, 인생을 걸 만한 참된 진리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뛰어나 보이는 점술가들을 찾아 다니며 참된 진리를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재산이 불어날수록 그분의 마음은 무거워지고 어두워집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그분은 두 가지로 노력합니다. 하나는 고아와 걸인들을 극진하게 대접한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의 뜻을 좋게 여기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의복과 돈도 아낌없이 내어 줍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새벽 치성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분은 매일 새벽 냉수로 세수한 다음 옷을 말끔히 차려 입고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참된 진리를 알게 해 달라고 치성을 드립니다.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분은 참 진리가 없다면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죽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죽을 각오로 진리를 깨우쳐 보자고 결심하고 새벽 치성을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려 18년 동안 매일 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가벼워지지도, 밝아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은100일 철야 기도에 도전합니다. 그분은 밤이 새도록 도교의 경전인 <태을보신경>을 암송하며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끝나는 날, 그분은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무슨 응답을 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기다리던 응답은 오지 않고, 불쾌한 일만 하나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김재옥이라는 매서인 —책을 판매하려 돌아다니며 성경을 전해 주는 전도자 —이 살았는데, 그날 그 사람이 방문한 것입니다.  
 
그 매서인은 그분에게 책 하나를 건네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책은 <인가귀도>라는 제목의 전도 책자였는데, 그분은 그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독한 벌레'를 잡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조상신을 업신여기는 못된 종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내에게 책을 던져 주고는 장롱 깊은 곳에 숨겨 두라고 말합니다. 
 
며칠 후, 그분은 아주 이상한 꿈을 꿉니다. 꿈에서 어디론가 이끌려 올라 갔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자신 옆에 섭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그분에게 은으로 만든 산통 —점술가들이 점괘를 넣고 흔드는 통—을 건네 주면서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라” 하고 말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분에게 다가와 아무 말 없이 빈 산통을 전해 줍니다. 
 
점술가로서 그분은 다른 사람의 꿈을 해몽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은 도무지 해몽이 되지 않았습니다. 꿈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심란하여 점치는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쯤 지났을 때, 장인이 찾아옵니다. 아내는 그동안 남편에게 일어난 일들을 친정 아버지에게 털어 놓습니다.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었는지, 장인은 매서인이 전해 준 그 책을 가져와서 읽어 보라고 합니다. 아내가 책을 가져와 읽어 주는데, 건넌방에 있던 백사겸 선생이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분은 그 이야기에 끌려 아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가 끝까지 듣습니다. 
  
<인가귀도>라는 전도 책은 어느 중국인이 노름으로 패가망신했다가 복음을 듣고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중에 그분은 마음에 감동과 감화를 받습니다. 그분은 꿈에서 예수님이 전해 준 은산통이 바로 그 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100일 기도에 대한 응답이 그 책이었던 것입니다. 그 날로 그분은 그 매서인을 통해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알립니다. 
  
3. 그때 마침 고양읍에 감리교회가 설립이 되고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 목사가 와서 첫 세례를 베풀 예정이었습니다. 백사겸 선생은 회심하자마자 고양읍 감리교회의 첫 세례자 중 하나가 됩니다. 세례 받은 날, 그분은 앞에 대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중에 그분은 그동안 자신이 지은 그 많은 죄와 그런 자신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교인들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소문난 점쟁이의 회심 이야기’는 삽시간에 여러 교회로 퍼져 나갑니다. 
 
세례를 받은 후, 그분은 점보는 일을 청산합니다. 그뿐 아니라 점술을 통해 번 재산을 두고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분은 당시에 현금 3천 냥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3천 냥은 엽전 30만 개의 가치라고 합니다. 오늘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억 정도가 됩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오지요?  
 
복채로 모은 돈이 그 정도였으니, 그분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자 그 돈이 그분에게는 죄 덩어리로 보였습니다. 30만 개의 엽전 더미에 눌려 사는 느낌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불의한 그 돈을 처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도둑 몇 사람이 그분의 집에 들어옵니다. 그때 그분은 두려워 떨고 있는 아내 곁에서 엎드려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불의하게 번 돈을 불의하게 가져가시니 감사하다고, 이렇게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니 감사하다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도둑 맞았는데, 그분은 날아갈 것 같이 기뻤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거지로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래서 집을 친구에게 양도합니다. 그런 다음, 아내와 이혼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자신은 어릴 때 해 보았기 때문에 거지로 사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까지 그런 고생을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아내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자 아내는 흐느껴 웁니다. 그분은, 아내가 버림 받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철저하게 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아내도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과 그 가족은 고양읍을 떠나 걸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들이 거지가 되어 처음 당도한 곳이 행주였다고 합니다. 행주에 있던 교인들은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 선생에게 간증을 부탁했고, 그분의 간증은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술가 백사겸’이 ‘전도자 백사겸’으로 변신합니다. 그분은 여러 동네를 다니며 간증과 전도를 했고,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는 그분을 유급 전도자로 삼습니다. 거지로 살 각오였는데 유급 전도사가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점쟁이 시절에 번 돈에 비하면 전도자의 월급은 박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주어진 것에 자족하면서 부르는 곳마다 다니며 간증과 전도를 계속합니다. 부르는 곳이 없으면 아들을 앞세우고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 다니며 전도를 했다고 하지요.  
 
그분은 회심한 후 아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언제나 말씀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암송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후 그분은 성경 전체를 머리 속에 넣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이 뭐요?” 하고 물으면 즉시로 답이 나올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이 사실은 리드 선교사가 남감리교회 선교 본부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세상 떠나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학자인 이덕주 교수님은 이 사진이 백사겸 선생의 영성을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1940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그분을 통해 믿게 된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고, 그분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손자를 통해 알게 되니 제가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분은 할아버지의 명성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그래서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꺼린다고 하셨습니다. 명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나 중요하지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믿음과 성품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손자분은 할아버지의 겸손과 진실함을 물려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는데, 이 정도는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4. 백사겸 선생은 ‘조선의 삭개오’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윤치호 선생이 그분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윤치호 선생은 백 선생의 아들을 자신이 한국인 1호로 유학했던 에모리대학교에 추천하여 공부하게 합니다. 그분이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던 백남석 교수이십니다. 동요 “가을이라 가을바람”을 작사한 분입니다. 현제명 선생이 부탁하여 쓴 것인데, 원래는 어린이 찬송가로 지은 것을 가사를 조금 바꾸어 동요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를 마음에 두고 삭개오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라는 마을 전체를 관장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식민지의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로마 제국을 운영했습니다. 세리들은 할당 받은 금액에 자신들의 몫을 더하여 착복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미움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 옵니다. 키가 작아서 뽕나무에 올라간 그를 예수님께서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을 반문하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이 강제로 빼앗은 재물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 그렇게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버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 꼴입니다. 그래서 백사겸 선생은 ‘조선의 삭개오’라고 불리기에 충분합니다.아니, 삭개오는 남은 재산의 절반은 가지고 있었으니, 전부를 버린 백사겸 선생이 한 수 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삭개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말이 후대에 과장되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를 비추어 보면 삭개오의 이야기도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가 삭개오를 다시 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에 삭개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삭개오의 절박함은 그분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세리장이라면 여리고에서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매우 체면 구기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삭개오는 왜 이토록 절박했을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가 답을 줍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백사겸 선생은 불의하게 치부하여 먹고 살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과 참된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니 불의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짓눌림을 벗어나고 싶어서 18년 동안 정한수를 떠 놓고 경문을 낭송했고, 유명한 점술가들을 찾아 다니며 길을 찾았으며, 백일 동안 철야하며 기도 했습니다. 
 
삭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세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키가 작았다”는 말에 단서가 있는지 모릅니다. 신체적 조건에서 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세리라는 직업을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늘어가는 권세와 재산에 비례하여 양심의 짓눌림도 커져 갔습니다. 동족들이 자신에게 던지는 무시와 경멸 그리고 그들이 마음으로 퍼붓고 있을 저주를 생각하면 밤에 자다가도 깨어날 지경이었습니다. 그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뭔가 참된 것,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니 로마 총독이 부여해 준 권세와 돈을 부여 잡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유명하다는 율법학자들을 찾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삶을 청산하게 해 줄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불의한 삶을 청산할 만한 빛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백사겸 선생처럼, 그가 백일 기도를 끝냈을 때 예수님이 그가 사는 동네에 당도했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불면의 밤을 지냈기에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런 영적 갈망이 있었기에 그는 체면 불구하고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 번민의 밤을 지냈기에 예수님이 그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제로 취한 재산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이후의 삭개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백사겸 선생의 이야기는 추측을 하게 해 줍니다. 삭개오는 물질적으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난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새털처럼 가벼운 영혼으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불의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의 변화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했을 것입니다.  
 
5. 저는 백사겸 선생과 삭개오 선생, 닮아도 너무 닮은 두 사람입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한 가지의 교훈이 제 마음에 뚜렷이 새겨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교훈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삶에 대해 집요하게 따져 물으라. 
Never give up questioning about your belief and way of life. 


두 분이 예수님을 참되게 만나고 삶에 변화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내가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대로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랬기에 그 많은 물질과 그 큰 권세가 그분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분들은 예수님에게 이르렀고 그분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진리에 그토록 목말랐기에 진리를 발견하자 마자 즉시로 불의한 삶의 방식을 청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그분들은 그 질문으로 계속 자신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평생 알아가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말씀을 붙들고 살았을 것이고, 더욱 마음 들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두 분이 보여 준 이 삶의 자세를 생각하며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내가 믿는 진리를 더 깊이, 더 온전히, 더 많이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그분들처럼 따져 묻고 있는가? 그렇게 따져 물어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즉시로, 단호하게 버릴 것 버리고 행할 것 행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편안하게, 넉넉하게, 불편 없이,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입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질문은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빨리, 더 잘 벌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더 만족할 수 있을까? 어디를 가면 더 맛있는 것이 있을까? 어떤 구두, 어떤 핸드백이 더 멋져 보일까? 
 
그것이 제일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가장 희망 없는 삶입니다. 진실하게 믿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백사겸 선생처럼 혹은 삭개오처럼 다른 질문을 합니다. 참된 진리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돈을 이렇게 버는 것이 옳은 것일까? 돈을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나의 영적 생활은 이대로 괜찮은가? 하나님 앞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매일의 묵상 중에 이런 질문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따라 자신을 성찰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귀찮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즐거워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질문하며 자신을 성찰한다면, 비록 삭개오 선생과 백사겸 선생 같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이 간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보는 사람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조금 더 바르게, 조금 더 거룩하게, 조금 더 의롭게 살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이 글은 와싱톤사귐의교회 2023년 1월 22일 주일 설교 전문입니다. 
원제 : 끝까지 묻는다(Never Give Up Questioning)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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