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는 '운전자를 끌어내자'고 말한 적이 없다
본회퍼는 '운전자를 끌어내자'고 말한 적이 없다
  • 김기대
  • 승인 2023.02.10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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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전광훈 당신이 함부로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전광훈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 한국에서 본회퍼를 웨퍼로 부른 적이 있다. 친미주의자인 그에게 본회퍼 목사의 이름은 , 성은 웨퍼인 미국인으로 인식되었던 같다. 이번에 LA 집회 신문광고에서 이름은 피퍼로 바뀐다. 이번에도 본과 피퍼 사이를 띄어 놨다. 옆에는미친 (김정은)에게 운전대를 맡길 없다라고 썼다. 문재인 정부가 끝난 마당에 굳이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전광훈에게 말은 금과옥조인가 보다. 사람들이 미친 X 윤씨로 오해할까 반공집회도 아닌데 난데없이 괄호안에 김정은을 넣었다. 친절하거나 오해가 두렵거나.

 

나치에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 베를린 함락을 며칠 앞두고 나치에게 사형당한 분을 고려하면운전사가 미쳤으면 끌어 내려야 한다 발언은 분의명언 맞아야 한다. 그런데 차종이 열차에서 버스로, 트럭으로, 심지어는 개인 승용차까지 전승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현재 정론으로 인정 받는 전승은 “잘못된 기차에 올라탔다면, 복도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봐야 소용없다.기관사가 미쳤으면 기관사를 끌어내려야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 나무 그루를 심겠다는게 스피노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듯이 어느 말도 본회퍼의 저작에 나오지 않는다. 기이한 상황을 가장 설명한 기사는 기독교 언론도 아니고 시사저널(2020 1 13, 1578) 있다.

본회퍼 연구자인 김성호 박사는(중략) ‘미친 운전사 이야기’는 본회퍼가 사형당한 1년이 지난 1946 3 편지를 통해 소개됐다. 박사는 “함께 감옥에 수감된 이탈리아 장교 출신 수감자가 자신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회퍼 목사는 ‘만약 쿠담거리(베를린 시내의 거리)에서 미친 사람이 그의 자동차를 인도를 넘어 운전한다면 저는 목사로서 죽은 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른다거나 희생자들과 관련된 이들에게 위로를 하는 일만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제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저는 위로 뛰어올라 운전대에서 운전자를 끌어내려야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장했는데, 전광훈 목사가 이를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없다’로 오역하고 있다”고 말했다.

 

뒤이어시사저널송창섭 기자는 다음과 같이 옳게 짚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역시 본회퍼의 기록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핑켄발데( Finkenwalde)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폴란드의 슈체친(Szczecin) 지역인 그곳에 독일 고백교회 신학교가 있었다. 본회퍼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학교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날의 기록은 ‘1935년에서 1937년까지 핑켄발데 상술되어 있다.

시기는 본회퍼의 신학이 중심을 잡기 시작하던 시기다. 일부에서는 신학교가 나치에 의해 폐교되자 본회퍼가 반나치 운동에 나섰다고는 하나 사실과 다르다. 핑켄발데 시절에 이미 그의 그리스도 중심(‘중심이신 그리스도’) 신학은 시작되었다.

당시 본회퍼에게 배운 신학생 하나는 이렇게 썼다.

성경은 우리 사역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신학적 작업과 모든 기독교 활동의 출발점이자 중심이 되었습니다. (어느 핑켄발데 신학생이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지금 신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1935-1937 핑켄발데 신학교, 본회퍼라 쓰인 표지석이 있다.

핑켄발데 신학교 자리에 있는 표지석
핑켄발데 신학교 자리에 있는 본휘퍼 표지석

 

Stephen R. Haynes ‘The Bonhoeffer Phenomenon' 따르면 핑켄발데 시절 신학생이 불의를 보고도 제국 교회(로마제국에 의해 세워진 교회와 히틀러의 3제국 교회- 여기서는 고백교회를 제외한 모든 신구교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느냐를 질문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기를 용기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고 솔직하게 답하면서도유대인을 향해 통곡할 있는 사람만이 그레고리안 찬트를 부를 으며시나고그와 교회가 불타고 미친 사람이 군중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면 누군가는 부상당한 사람을 싸매주어야 하지만 운전대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not~but 아니고 either~or. 상처를 싸매는 것과 운전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답했다는 것이다. 역시 기록물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스티븐 헤인즈는 훗날 본회퍼의 이야기가 서사화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으로 봤다.

핑켄발데 시절 본회퍼의 신학적 주제는 유혹(시험)이었다. 아버지가 의사인데다가 어머니는 신학자 카를 폰 하세와 화가 스타니슬라우스 폰 칼크로이트의 손녀다. 개신교 명문가의 아들로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실력있는 목회자로서 나치의 만행을 외면하자는 유혹에 조금만 넘어가면 그의 탄탄대로는 보장되어 있었다. 본회퍼는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

그도 부족한 면을 가진 사람이어서 여동생이 유대인과 결혼하려고 무척이나 반대했었다. 집안을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유대인을 향한 편견이 본회퍼도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 절멸정책이 심해지자 그는 반나치에 섰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유대인, 오늘날의 말로 하면 장애인, 성소수자, 탈북인, 3세계 노동자에 대한 편견에 슬쩍 눈감으면 우리는정상적 이웃과 더불어 있다는 유혹이 있다.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독일로 귀국할 사람들은 귀국하면 죽는다고 그를 말렸다. 속마음으로는 좀더 확실히 말려주지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미국생활의 편안함과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남겼다. 그러나 편함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목사들이 힘을 숭상하는제국교회 남아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고백교회적 삶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본회퍼의 운전자 발언은 자주 인용된다. 이제 그만하자! 근거가 불투명해서 그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발언이 요즘도 소비되는데 본회퍼의 운전자 발언이 잘못이 있겠는가

본회퍼는 저항가가 아니라 경건한 신학자요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가 걸어가야 모범이다. 그에게 저항은 신앙의 결과물이 아니라 신앙 자체다. 그래서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주어진다. 저항은 윤리적 다짐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이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신앙의 본질이다. 저항과 행동이 윤리적 결단으로 이루어질 경우 산상수훈을 신학의 뿌리로 삼았던 본회퍼의 정신은 훼손된다.

저항이 용기나 윤리에 기초하지 않고 신앙의 본질이 미친 X 자기 손에 핸들이 쥐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버스가 되었건 기차가 되었건 아무튼 뛰어 내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 과시욕, 권력욕의 유혹에 넘어간 전광훈이 함부로 거론해도 되는 본회퍼가 아니다. ‘빤스’, 까불면 천박한 용어를 쓰는 입에 올릴 본회퍼가 아니다. 그대는 웨퍼, 혹은 피퍼로 불리는 미국인과 계속 놀아라!

끝으로 익히 알려진 시지만 본회퍼의나는 무엇 소개한다. 시는 사형당하기 10개월 전인 1944 감옥에서 썼다. 일부에서는나는 누구인가 번역하는데 죽음을 그의 성찰을 담은 시는나는 무엇으로 번역하는게 맞다.

나는 무엇?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 침착하고 명랑, 확고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무엇?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 자유롭고 친절,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 같다는데

 

나는 무엇?

남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불행한 하루를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 평온하게 웃으며 당당한지

마치 승리만을 아는 투사 같다는데

 

남의 말의 내가 나냐?

스스로 아는 내가 나냐?

새장에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하고

방종과 사소한 굴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나다.

이별에도 지쳤다......... 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무엇?

어느 것이 나냐?

오늘은 사람이고 내일은 사람인가?

둘이 동시에 나냐?

앞에선 허세, 자신 앞에선 한없이

불쌍하고 약한 난가?

이미 결정된 승리 앞에서

무질서에 떠는 패잔병에 비교할 것인가?

 

나는 무엇?

적막한 물음은 나를 끝없이

희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나를 아는 이는 오직 당신뿐

나는 당신의 것이외다.

!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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