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벗 최혁배 형을 추모하며 (1951-2023)
전태일의 벗 최혁배 형을 추모하며 (1951-2023)
  • 유재무 목사
  • 승인 2023.03.08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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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EYC (한국 기독교 청년 연합회) 40 지기 감리교 출신 변광순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혁배형하고 만나기로 했는 인근에 사니 너도 보고 싶다고 하여 2호선 강변역 어느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휄체어에 의지해 나타난 모습에 놀랐지만 말이나 행동은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옛날 회포를 풀며 30년의 공백을 채우기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후 페이스북으로 소통했는 성격이나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예리했다. 혁배형은 몸의 장애로 인한 활동제약을 SNS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그후 어떻게 처와도 연결 되어 메지지를 주고 받고 얘기들을 나누는 사이였다.

민주당과 문정부에 대한 절망과 비판 글도 자주 올려서 생각이 다른 분들과는 폐친을 끊기기도 하고 대면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니 독불장군식으로 자기 생각을 배설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의리 좋은 동료들은 좋아요로 소통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가장 추웠던 올해 1 20 구정에 광순이가 술취해서 연락이 왔다. 혁배형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상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하여 마음에 짐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혁배 사후 아직 어디 안장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외조모에게 홀로 성장해 가족은 아무도 없다. 이에 선한 일을 시작한 이들을 돕기로 하고 늦었지만 추모의 글도 남긴다. 내가 혁배형을 만난 것은 1980 EYC 서울지구회장을 때다. 흰셔츠에 검은 단벌 양복을 입고 곱슬머리에 돗수 높은 안경을 모습인데 손학규 전의원이 영국 유학으로 사임한 NCC 후임 간사가 것이다.

혁배형을 다시 만난 것은 1982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권호경목사가 실시한 훈련 프로그램을 천영초 선생과 주관할 때다. 1년동안 합숙과 이동훈련을 받았는 나는 전반기만 했는데 YMCA 의정부 다락원, 주민교회에서 서울대 김세균교수, 김근태, 장명국(석탑출판사) 당시 내로라 하는 분들로 부터 강의와 현장방문과 토론식 훈련을 하였다. 모두 미혼들을 10여명 모아놨으니 3쌍이나 맺어지는 사고(?) 났다. 박일성, 오용식, 유재무다. 훗날 권호경목사는 훈련들 하라고 했더니 연애질이나 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과정에서 혁배형과 먹고 자고 가깝게 지내게 되는 최근에 들으니 처와 크게 뻔한 사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그후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광산촌인 태백으로 일본 선교사로 사역하느라 연락이 두절된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독일로 미국으로 가서 국제 변호사가 되었다고 되었다는 생각만 했는 사후 유골마져 오갈 때가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런 가운데 최근 지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안치를 위하여 준비를 한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추모 글도 남긴다. 아마 독일에서 무난히 학위를 끝냈다면 대학교수도 했을 것인데 6개국어를 하는 실력으로 늦은 나이지만 뉴욕주립대(NYU) 국제변호사가 것도 그렇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까칠한 성격으로 가까이 가기는 어려워도 한번 정을 맺으면 의리가 있는 성품이다. 듣기로는 군인 아버지로부터 어려서부터 스파르타식의 교육에 대한 반발로 강인한 성격이 되었다고 들었다. 외모가 작으니 남에게 지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느낌이면 공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심이 없고 입이 무거워 본인은 한번도 전태일과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던 시대라고 하지만 자신이 일에 대하여 떠벌리지 않았다. 오래 전태일의 정신을 가장 의미있게 실현한다고 하는 청계피복 3 노조위원장 민종덕은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태일이 아니다" 라는 글을 통해 건물주에게 쫓겨날 염려가 없는 자체 건물의 필요성을 설파한 적이 있다.

이런 호소에 멀리 '인간의 대지'에서 답이 왔다. '인간의 대지' 생텍쥐베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따온 이름으로 생텍쥐베리의 저작료로 설립한 재단이다. 혁배형은 청계 노조와 연결 해준 것이다. 청계노조 뿐만아니라 환경운동, 민주언론운동, 민중불교운동, 경인지역 노동단체 등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그는 드러나지 않게 전태일을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대지로 부터 지원 받은 돈으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 137-106 위치한 한옥을 85 3월에 매입했다. 이곳을 '평화의 '이고 이름 짓고 노조사무실로 입주했다. 이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에서도 문익환 회장님을 통해 미국 장로교의 도움으로 전태일기념관을 마련할 있었는데 동대문상가아파트 4층에 공간 채를 매입해 85 6월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는 전태일기념사업회로 개명, 발전했다. (민종덕의 중에서)

전태일 분신후 뜻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하신 이소선여사와 동생 전태삼과 동고동락하면서 관계를 가져 왔다. 그리고 늦게 전태일과 어머니가 계시고 서울 법대 선배 조영래변호사등 민주화운동 선후배 동지들의 영령이 깃든 마석 모란 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어렵게 안치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오는 3 10(49) 가족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십시일반으로 경비를 모으게 것이다.

최혁배 동지(1951-2023) 약력
어린
시절 군인 출신 부친과 생활하다 외조모에게 성장하여 경북고를 나와 1970 서울법대에 입학, 70 11 전태일분신으로 서울법대 추모 활동, 71 ‘후진국사회연구회’활동을 인연으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활동, 위수령조치로 제적,투자회사 재직중 시국사건으로 구속, 79-83 NCCK 국제위원회 실무자,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실무자, 83 서독 프랑크프르트대학으로 유학, 86 이경숙씨와 결혼하여 1녀를 둔다.

87 독일에서 물리학자와 교류중 국가보안법으로 조사 고문과 구속, 2심서 집유로 석방, 88 미국 뉴욕대 로스쿨 국제법 변호사 취득, 94 귀국 선경그룹 법률고문, 96 도미하여 변호사 10 개업, 2014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약화로 귀국(휠체어 의존 시작) 2023 1 20 코로나 감염과 폐렴으로 소천한다.

서울 법대 재학중인 70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으로 추모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생을 청계피복 노조와 이소선 어머니, 전태삼선생과 교류했다. 졸업후에는 노동자로 살기위해 후배 전종덕과 위장 취업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후방지원하는 역할를 자원한다. NCCK 실무자로 시절 1967 독일에서 창립된 ‘테르 좀므’(인간의 대지) 연결해 한국 공해문제연구소,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전태일기념사업회, 청계피복노동조합, 서울노동운동연합, 민중불교운동연합, 민주언론운동협의회등을 지원하도록 가교역할을 한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애정을 보인 곳은 전태일기념관(평화의 )으로 지원한 단체와 교류한지 20 만에 한국을 찾은 대표를 통하여 평화의 집’ 건립금 당시 24 마르크(당시 환율로 14400만원) 지원받도록 주선한다. 서독에서 연류된 국보법으로 안기부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국제변호사 되지만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선경그룹 법률고문 변호사를 거쳐 최근까지는 동서울 터미널 근처 신한계열 회사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있었으나 집한칸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포스터에 나와 있는 후원구좌로 하면 된다.

유재무 목사(예장뉴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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