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무라 간조 칭송, 이제 그만하자
우치무라 간조 칭송, 이제 그만하자
  • 김기대
  • 승인 2023.03.20 16: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무라이 숭배자였던 우치무라 간조

윤석열이 17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행한우리의 미래를 위한 용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용기는 생명의 열쇠라는 오카쿠라 덴신(1862-1913) 말을 인용하면서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취지로 연설했다고 한겨레가 보도했다. 오카쿠라 덴신은 대표적인 한국 멸시론과 침략론을 주장한 인물이다. 예상했던 대로 조선일보는 오카쿠라 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서 안중근의 아시아 평화론까지 동원해 그를 변호했다. 윤석열을 지키기 위해 침략론을 주장한 오카쿠라를 변호하고 정당성을 위해 안중근까지 끌어들인 조선일보의 논조가 신박하다.

윤석열의 대일 행보로 때아닌 친일논쟁이 불지펴진 요즘, 과연친일파아닌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실수가 없는지 살펴 필요가 있다. 일찍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아시아에 맹주가 일본의 저력은 부정할 없는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어디 땅에나쁜 일본 X 있었겠는가? 근대화 덕분에 일찍 눈 뜬 사상가들을 비롯한 이른바 선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은 분명히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근대 이후 서구 세계와 접촉하면서 알게 생경한 단어들도 모두 일본의 조어(造語) 덕분이라는 외면할 없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덕목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경험된 것일뿐 우리 스스로가 지나치게 부채감이나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런 입장을 기독교계에서 찾아 보면 우치무라 간조나 가가와 도요히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글이 상당한 논쟁을 불러 올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과도한 칭송은 우리 교계에 역시 과도하게 많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 일본의 무교회 운동을 창시한 인물이다. 여기서 무교회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제쳐 둔다. 삿포로 농업학교에서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유명한 클라크를 만나면서 기독교에 귀의한 그는 일본적 기독교를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의 사상에 빠져든 조선의 젊은이들 중에는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등이 있었지만 류영모는 일찌감치 자신의 신학을 구축했고, 함석헌은 한국형고난의 신학’, ‘노자’, ‘장자 거쳐 말년에는바가바드 기타 통해 인도사상으로 선회했다. 김교신만이 조선의 우치무라 간조의 순전한 계승자가 되었는데 우치무라 간조의 명망 덕분일까? 자신만의 신학을 구축한 류영모와 함석헌에 비해 김교신이 많이 칭송되고 있다. 김교신 덕분에 우치무라 간조도 여전히 인기(?) 있다. 2000년에는 보수적 기독교 출판사인 크리스천 서적에서 10권짜리 내촌감삼(內村鑑三)전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우치무라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 한국에서는 유교 정치 밑에 간신히 하층민이 믿는데 그친 불교가 일본에서는 왕실의 종교가 되었고 우리의 보화와 미술과 지능은 모두 그에 종사하여, 이제는 불교 국민 중에서 우리처럼 널리 석가의 감화력을 입고 진리를 해득하는 자가 지구 상에 없게 되었다. (지인론)

정말? 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층민이 아니라 왕실이 믿기 때문에 훌륭한 종교라는 주장은 어떤 종교든 최초 형태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과 함께 출발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게다가 종교가 무슨 운동경기인가? 저마다 특성이 있는 법인데 어디 것이 어디 보다 낫다는 논리로 어떻게 종교를 평가하는가?

후술하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우승(優勝) 열패(劣敗) 파악하는 사회 진화론자였다. 종교를 우승과 열패로 파악할 있다고 감안해도 일본불교는 본래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근본 불교 사상과는 다른, 일단 '나'를 전제해 놓고 그것을 비우자는 자기 계발 형태를 지닌 비정통 불교다. 또한 그렇게 뛰어난 불교 보화와 미술이 있으면서 조선의 불교 예술은 약탈해 갔는가?

우치무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타종교에 대한 그의 열림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열려 있는 지점은 타종교가 아니라 일본화된 타종교, 일본에 방점이 찍힌 타종교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 솟는 일본의 빛으로

한국과 중국도 빛을 알리라

맞다. 그는 일본 사람이다. 일본인이 자기 나라를 높이는게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약소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나라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백성이 있고, 나라를 잃었다고 슬퍼하는 백성이 있다. 그렇지만 기뻐하는 자도 일시이고, 또한 슬퍼하는 자도 일시이다. 오래지 않아서 사람이 같이 주의 앞에 것이다. 그리하여 육신에서 행한 바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만일 전세계를 얻었더라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일 우리 영토가 팽창하여 전세계를 함유하기에 이르러도 우리 영혼 잃는다면 우리는 어찌할까. 아아, 나는 어찌할까.(영토와 영혼)

조선의 국치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1910 9월의 글이다. 우치무라는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은 외면한 채 나라간에 지내서일선(일본 조선)인의 진정한 합동 융화를 이룰 있는 방법은 나라의 갈등은 잊고 좋은 기독교인이 되는데 있다는 동정론을 편다. 우치무라는 누구보다도 일본과 기독교의 관계를 중시했으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조선의 영토보다는 기독교에만 강조점을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은 세련되었다. 누가 먼저 추락하나를 경쟁하는 듯한 한국교회 풍토에서 그의 말은 샘물처럼 신선하다. 우치무라가 한국 교계에서 아직 인기있는 이유다.  드라마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종이 친일파의 거두 이완익에게 말이 생각난다.

경의 말은 옳다. 옳으나 공허하다, 경의 말은 선명하다. 선명하나 사납다.

우치무라의 말이 사납다고? 그는 일본의 잔인한 사무라이를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칭송한다. 

무사도(사무라이) (하나님이)일본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무사도가 있는한 일본은 번영하지만 이것이 없어지는 날에는 망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천년이란 세월 동안 현재의 세계 상태를 타개하시기 위하여 일본에서 무사도를 배양하고 계셨던 것이다. 세계는 마침내 기독교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그것도 무사도 위에 접목되는 기독교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다.

먼저 무사가 다음 위에 다시 믿음, 소망, 사랑의 아름다운 성품을 덧입어야 한다. …무사도를 버리거나 멸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훌륭한 제자가 턱이 없다. 하나님이 일본인 가운데서 특별히 요구하시는 사람은 무사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다.

어디서 이런 사상이 태동되었을까? 1891 도쿄 1 중학교 촉탁교사였던 우치무라는 교육칙어의 봉대(奉戴- 삼가 받들다) 봉독(奉讀- 예배에서 봉독이란 용어는 이제 그만 사용해야 한다)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거부했다. 제국주의로의 도약을 준비하던 일본에게 교육칙어는 애국심의 표현을 넘어선 국가 이념의 강요였다. 일로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퇴직 처리 되는 고초를 겪었다. 여기까지는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그는 천황제와 전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그것을 수행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한없이 충성했다.  그는 일본 종교 정책의 충직한 실행자였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도와 교를 구분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로 내몰렸던 그 이론의 기초를 우치무라가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하 신사참배 목사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냉혹하게 비판하면서 우치무라에 대해서는 관대한 한국인들이 반성할 지점이다. 

메이지 시대는 진화론의 입장에서 자연도태개념을 도입함으로써 19세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기독교를 종교 경쟁의 최후 승자로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승인하되 도덕의 하위 개념으로 보았다. 메이지 헌법 28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 신민은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어긋나지 않는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다시말해 종교는 신민의 도덕인 신도(神道)보다 하위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나 기독교처럼 종교 범주에 속하게 것은 어미를 종교에서 본떠 () 하고 도덕에 속하는 것은 신도와 같이 ()라는 말로 정착시켰다. 원래도덕이라는 자체가국민도덕론이라는 용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서양적인 개념인 윤리에다가 교육칙어로 대표되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일본의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기서도 일본의 공적 영역이 국가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있다. (이소마에 준이치,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114~115)

우치무라 간조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그것의 사회적 접목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옳았지만 일본을 음험하게 휘감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이 가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격하다)시킴으로써 신도의 영역으로 올라갈 있다고 믿었던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것이 도덕과는 담쌓고 있는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신선하게 보일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닌 거는 아닌거다. 그는 사무라이 사상의 추종자였고 제국주의 일본의 한계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칭송 이제 그만 하자. 자칫하면 우치무라의 과도한 일본 찬양 때문에 지금 윤석열이 하는 것처럼 우리의  자기비하로 귀결될 수 있다. 우치무라의 제자 김교신의 글에 조선의 자기 비하가 자주 보이는 까닭도 그의 영향이다.

일본의 침략기에 조금이나마 일본과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명망있는 신학자로 그를 기억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우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충현 2023-03-21 20:48:18
완벽한 인간이 없다는 좋은 예가 되겠네요. 칼뱅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말이 많습니다.

누구든 과오를 들추면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이 없고 다 어딘가는 더럽고 어느 정도는 크고 작은 정신병들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ㅂㅅ같은 윤석렬은 변호할 수 없지만 간조는 그래도 좋게 보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일본인으로써 일본에서 받은 교육으로 그런 옛사람의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거기에 복음을 적용하여 버리지는 못했나봅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