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황긔환 선생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애국지사 황긔환 선생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 조원태 목사
  • 승인 2023.04.06 0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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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조국에서 See You Agai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이 드라마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황긔한 선생이 뉴욕에서 순국한 지 100년만에 고국땅에 묻힌다. 조국을 위해 일본에 항거했던 황지사는 굴욕적인 외교로 어수선한 고국을 어떻게 생각 하실까(?) 뉴욕의 공동묘지 한켠에 외로히 묻혀있었던 황긔환 선생의 묘지를 절기 마다 혹은 때때로 교인들과 함께 찾아 뵙고 그 삶을 기렸던 뉴욕우리교회 조원태 목사가 고국으로 떠나는 황긔환 선생에게 감사함을 담아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 편집자 주 -
황긔환 지사가 묻혀있는 뉴욕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

1. 간혹 공동묘지를 걸어요. 교회에서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뉴욕의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는 제게 새벽 산책길이 되어주지요. 19세기 후반의 무덤들 사이로 물안개가 자욱하고, 나무와 꽃이 아침햇살을 머금은 공동묘지의 새벽은 흡사 경건한 수도원에 온 듯하거든요.

공동묘지에서 새벽산책은 삶과 죽음 사이, 역사와 현실 사이를 잇는 경이로운 다리를 걷는 묘한 묵상을 채워줘요. 새벽예배를 마친 교우들이 공동묘지 산책을 따라와 걸었던 기억들은 빈무덤의 언덕을 올라가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된 듯한 황홀한 경험이예요.

그런데 언덕 위 늘 지났던 길인데, 무심하게 지나쳐 왔네요. 황긔환 선생님께서 잠들어 계신 곁을 분위기만 내며 지나친 저의 수준이 들통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부끄럽게도 저는 선생님을 모티브로 제작된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를 먼저 알았지요.

1904년 10대 후반의 소년으로 미국에 망명한 선생님은 한인동포 1.5세의 뿌리가 되셨네요. 타국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민자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황긔환 선생님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셨어요.

떠난 이민자들의 향수도 이리 깊은데, 잃어버린 사무치는 설움은 얼마나 깊으셨을까요? 선생님은 해외에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조국의 3.1 만세운동과 하나가 되셨지요. 삼일 104주년을 얼마 전 타국에서 맞은 저는 선생님과 편지로 다리를 놓아요.

 

왼쪽 뒷줄 왼쪽 끝이 독립운동가 황긔환 선생이다
왼쪽 뒷줄 왼쪽 끝이 독립운동가 황긔환 선생이다

2. 1918년 5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에 자원 입대한 선생님은 유럽전선에서 기독교청년회 구호병으로 전쟁 한복판에 서셨더군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유럽을 떠나지 않으셨던 것은 1919년 6월 파리에서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기 위함이셨구요.

어떤 개인의 출세와 입신양명의 유혹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생님께서는 민족의 얼을 지켜내 주셨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신 황긔환 선생님은 나라 잃은 해외 한인 이민자들을 지켜준 고마운 대한의 외교관이셨어요.

1919년 9월, 일제를 피해 러시아를 거쳐 영국에 건너왔던 한인 노동자들이 구제요청을 했을 때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었지요. 도리어 영국은 한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건네려 했었고, 강제징용에 끌려갈 처지였죠. 200여 한인 노동자들을 구하려고 에든버러까지 가셨다면서요.

강제징용을 당할 것이 뻔한 난민과 같던 해외 한인노동자들의 강제 귀국을 반대하는 고군분투의 노력을 선생님은 다하셨지요. 그 엄혹한 시절에 프랑스 노동부에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 요청을 해 주셨고 거절의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설득한 선생님은 홍재하를 비롯한 35명의 한국인들을 프랑스에 정착시켜 주셨지요. 단 한 명이라도 적국에 넘겨주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절절한 노력은 그 시대의 쉰들러셨어요. 교섭을 통해 국민을 구하러 나선 최초의 시도를 성공시킨 첫번 영사셨죠.

 

3. 백년이 넘어 한국은 세계 국가별 국력평가에서 6위에 올랐다는 2022년 보고서가 US 뉴스에 나왔어요. 일본은 8위를 했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은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이런 국민의 자존심도 고려하지 않고, 역사 앞에 일말의 양심까지 저버렸어요.

일본 전범기업들이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배상토록 확정했던 대법원 판결을 한국 대통령은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지요.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돌아와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해 한 맺힌 일생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한국의 대통령은 그분들을 유령 취급했지요.

파리에서 한 노동자라도 구하려고 사력을 다한 선생님의 외교 진심을 대통령은 안중에 없는 것이겠죠? 외교는 자국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될 텐데, 어디서도 대통령의 애국은 보이질 않네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대통령을 자처했지만, 가해자의 도끼질만 연신이네요.

강제노동의 사지로 몰린 해외 한인 노동자들에게 피난처였던 선생님에게 이 황망한 현실을 토로하고 싶어요.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에서는 일제 침략의 원인을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선조들 탓으로 돌렸으니 선생님의 독립을 위한 장한 외교는 어찌되나요?

파리에서 베트남의 호찌민을 만나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를 위해 나는 온 몸을 던질 것이고, 나의 독립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 말하셨을 때, 베트남 국부 호찌민은 많은 영감을 받았다죠. 세계에 영감을 주는 황긔환 선생님의 외교가 그리운 밤이예요.

 

4. 외교관이면서 초대 언론인이기도 했던 황긔환 선생님에게 족보 없는 오만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짓밟는 한국의 현 정부를 향해 따끔한 언론인의 필치를 부탁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유럽언론과 미국언론에 일제 식민지배의 실상과 독립의지를 호소하는데 앞장서 주셨다지요.

메켄지 기자에게 선생님은 일제에 맞선 조선 평민들의 의병활동과 3.1운동을 알리셨지요. 그 외국 기자에 의해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이 출간되도록 했던 선생님이야말로 대한의 초대 언론이셨어요. 일본 극우 세계관마저 겁 없이 공유한 한국언론들이 선생님 기개를 알까요?

1920년 잡지 자유한국을 발간하여 3.1 만세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프랑스와 영어로 천부를 발행해 배포했던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지요. 조선의 아픔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대에 일본 식민지배의 잔인한 실상과 조선민의 견고한 독립의지를 세계언론에 호소한 선생님 앞에서 요즘 고국의 언론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보이네요.

1919년 8월 25일자 ‘뉴욕 헤럴드’ 신문과 인터뷰를 한 선생님은 강자의 언론 앞일지라도 인터뷰의 교본을 보여주셨네요.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며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것이다”

한국에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며 교묘한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일본의 논리 앞에서 선생님은 말하셨죠. “일본이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고집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없을 것이다.” 속국의 늪으로 빠지게 할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건 한국 대통령은 이런 혜안을 들을 귀가 있을까요?

민족대표 33인이 조선 땅에서 대한민국 만세 함성을 삼천리에 울려 퍼지게 한 마이크였다면, 선생님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며 국권을 상실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려 준 민족의 스피커가 되어 주셨어요. 말을 과녁에 명중시킨 참 언론인이셨어요.
 

뉴욕우리교회 교인들이 3.1절 예배후 황긔환 선생의 묘지를 찾았다.
뉴욕우리교회 교인들이 3.1절 예배후 황긔환 선생의 묘지를 찾았다.

5. 저는 해마다 삼일절이면 교회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데리고 선생님 묘비 앞에 섰었지요. 올해 그날 봄볕은 유난히 따스했구요. 그런데 저는 황긔환 선생님에게 드리는 글을 읽다가 자녀세대 앞에서 그만 오열하고 말았네요. 의지한 비빌 언덕이 없어져 버린 느낌이었을까요?

이곳 묘지를 늘 걸었는데도 저는 선생님을 몰랐어요. 무심히 지나쳤죠. 그러나 어느 날 선생님은 저를 붙잡아줬어요. 풍전등화의 민족 위기 앞에 젊음을 불살랐던 선생님은 마치 사제처럼 저를 온유하게 반겨 주셨었는데~ 이제 고국의 더 많은 이들을 다독여주세요.

70년 분단의 갈등 속에 놓인 제 조국은 지금 선생님처럼 민족의 평화를 위해 마중물이 되어 줄 젊은이들이 필요해요. 1923년 40세 나이에 심장이 마비되어 하늘로 간 선생님은 사랑과 정의가 마비된 이 시대에 여전히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이셔요.

독립군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101년만에 카자흐스탄에서 모셔올 때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6대가 엄호 비행한 귀환길을 봤을 때 자부심이 차올랐었지요. 애국지사 황긔환 선생님의 고국 귀환길에 이런 뭉클한 장관을 기대하는 것은 이 정권 하에서 아마도 백일몽이 되겠죠?

저는 알지 못해요. 황긔환 선생님이 얼마나 나라 잃은 설움에 복받쳐 타국에서 설움의 눈물을 흘렸는지 저는 알지 못해요. 그러나 저는 알 수 있어요. 선생님이 흘린 눈물로 오늘 우리가 대한의 아들 딸로 어엿하게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어요.

조목사는 6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황긔환 지사의 묘지을 방문했다가 고국으로 돌아 가기위해 파묘 된 흔적을 보고 기분이 묘하다고 전해왔다.
조목사는 6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황긔환 지사의 묘지을 방문했다가 고국으로 돌아 가기위해 파묘 된 흔적을 보고 기분이 묘하다고 전해왔다.

고맙고 많이 그리울 거예요. 잘 가세요. 100년만에 그리던 고국의 품으로 부디 잘 가세요.

2023년 고난주간 뉴욕의 밤하늘 아래서

조원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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