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과 그리스도교
각자도생과 그리스도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22 08: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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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성이 사라진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각자도생의 길이 되었다!

오늘 아침 한 유명한 은퇴한 목사님의 글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정상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젊은 목사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내용을 보았다. 추신수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만일 추신수가 오랜 기간의 마이너 리그 소속 시절, 만일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구에 전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라는 비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이중직을 갖는다면 어떻게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이중직이 대세인 오늘날 개신교계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개신교는 각자도생의 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목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교회 목사들 가운데 아무도 그런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으로 한 달에 십만 원이나 오만 원 정도를 보내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일 뿐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거나 그럴 여유가 없어지면 그런 후원도 끝난다.

그래서 기껏 호기롭게 뛰어든 목사의 길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험을 하려면 제대로 시험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기왕에 시험을 하려면 죽을 때까지 견뎌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사실 이 짐은 정말 무겁다. 이런 짐은 사실 서로가 져야 하는 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경우, 그 짐을 책임지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이 가려진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모든 비난을 견딘다는 것이다. 무책임하다는 말은 정말 아프다. 그러나 그 짐을 지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이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설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목사가 되어 교회를 하면서 모든 재산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신용불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도 신용불량자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나는 무책임한 가장이라는 멍에를 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살았다. 내 자랑 같은 이야기지만 내겐 과분한 삶이었다. 주님은 부족한 나를 보호해주시고, 내가 지고 있는 짐을 대신 져주셨다. 나는 이중직을 가지지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고, 잘 살았다. 그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도 있고, “죽으면 죽으리라”의 설교는 물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설교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이 안전한 길이며 돈이 줄 수 없는 평화의 길이라는 사실을 내 삶으로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목사의 길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의 제자라면 말이다.

교회는 예수 공동체이고 예수 공동체의 목표는 변치 않는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 관계는 서로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런 관계를 이룬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염려하지 않는 삶이란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입증해야 하는 신앙의 삶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예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해서 오로지 주님의 보호하심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당연히 그런 나는 예수 공동체가 꿈이다. 그래서 그런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근에 아프게 경험해야 했다.

가난해지고, 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삶은 끊임없이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누구도 나와 영원한 관계인 변치 않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다. 당연히 믿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를 가난한 애물단지로 여길 따름이다. 괜히 깊은 관계를 맺었다 무슨 손해를 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돈을 바라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당연히 나는 돈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로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난하니 돈을 바라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돈을 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돈을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물처럼 돈이 흐르는 관계이다. 그들은 돈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면 그 공동체를 책임지시는 분은 돈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나는 내가 돈을 바라는 사람이 되는 역할을 기꺼이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지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도움을 받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그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길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역할 중에서 나는 힘든 역할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버림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자. 땅이나 집을 팔아 그 판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던 사람들의 이후의 삶은 어땠을까? 그들과 바나바는 어떻게 살았을까?

여기서 땅이나 집을 판다는 것은 이 내용에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기사를 읽어보면 모든 것을 다 파는 일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방비가 되는 것이 두려워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땅이나 집을 팔아 그 판 돈을 사도들의발 앞에 놓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체와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거나 상상하지 못한다. 각자도생이 신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전 재산을 팔아 갖다 바치는 것은 이단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예수 공동체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기꺼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복된 사람인가. 주는 자인가? 받는 자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일부를 남겨서 스스로를 돌보는(각자도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는가?

서로 사랑하는 예수 공동체에서는 주고받음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렇게 주고받음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다. 그래도 각자도생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막을 방법이 없다. 계속해서 버림받는 내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에 점점 더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경험이 내가 반드시, 그리고 반복해서 경험해야 할 것이기에 주님은 오늘도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신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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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n M Kim 2023-06-27 02:32:46
각자도생이라는 말에 마음이 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