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2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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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프로여야 한다?“

최근 이재철 목사님의 위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틀린 말일까? 맞는 말일까? 생각나는 다른 유명한 분이 있다. 김동호 목사님이다. 이분은 목사를 의사에 비유하고 교회를 병원에 비유했다. 자신의 병을 아무 병원이나 아무 의사에게 가서 고치려하는 이는 없다는 취지로 먼 곳에서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런 교회에서 목사는 영적인 의사이다. 이분은 영적인 의사로서 목사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프로와 전문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사가 전문가이고 프로일까? 그것은 매우 성직자적인 사고이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만인제사장이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톨릭의 성직자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성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목사는 프로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목사는 프로나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가 프로가 되고 전문가가 되면 교인들이 아마추어가 된다. 아무리 아마추어가 프로를 흉내 내도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나 모임은 결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다. 오직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프로와 아마추어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섬김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우상이라는 의미에서)’과 팬클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서로를 돌보는 삶을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런 그리스도교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재철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은 그래도 조용기 목사님이나 김장환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이나 감리교 삼형제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신 분들이시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 존경받는 분들의 역할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후자 목사님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을 위해 예를 하나 들겠다. 나는 얼마 전 공동체에 관한 책을 하나 번역했다. 그곳에 유명한 교수이자 목사님이신 분이 나온다. 

“존 하워드 요더는 신학계에서 떠오르는 별이었고 급진적인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아나밥티스트 비전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탐구하는 신 아나밥티스트 세대를 뒷받침했습니다. 1968년에 그는 지금은 유명해진 <예수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원고의 초기 버전을 우리 사이에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존이 우리를 위해 열어준 공동체를 함께 탐험하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요더는 공동체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끊임없는 강의와 저술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녹아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교수이며 최 연장자인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공동체 속에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특별하거나 혼자였다. 결국 그가 속한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하워드 요더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영웅이나 엘리트, 위에서 이재철 목사님이나 김동호 목사님이 말하는 프로나 전문가가 참 교회의 모습이며,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공동체의 프로였고, 전문가였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 안에서 그는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자 사회인 교회에는 프로나 전문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이 프로나 전문가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역적이거나 반역자이다.

성서에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모습을 “본”이라는 단어에 담고 있다. 나는 최근 손자를 통해 “본”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배우고 있다. 손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면 내가 손자처럼 되어야 한다. 또 손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야 손자가 배울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공을 잘 던져도 손자는 내가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나를 흉내 낼 수 없다. 공을 차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손자의 입장에서 손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관찰해서 녀석이 해낼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 이 일에 프로나 전문가는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오직 손자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비우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비우시지 않는다면 인간인 우리는 그분을 본으로 삼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바로 이 비움에 있다. 프로나 전문가는 무엇인가를 채워야 한다.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재철 목사님이나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면에 있어 그야말로 탁월하신 분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분들을 본받을 수가 없다.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비워야 누구든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당신의 양들을 먹이라는 위임을 비로소 하실 수 있었다.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당신의 양을 맡기실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제자양육은 당시에 가장 흔하고 일반적이었던 장인과 도제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인과 도제의 방식은 마지막에 이르러 세상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장인은 죽을 때까지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제자 양육에서 도제인 그리스도인이 제자가 되면 장인과 도제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들이 자매와 형제가 되기 때문이다. 양육의 과정에서는 세상의 권위와 비슷한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자가 되는 순간 우열은 사라진다. 그들은 자매와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다. 상호 섬김과 상호 복종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문가로서 하워드 요더는 그 일에 실패했다. 하워드 요더가 특별히 권위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특별했다. 그가 할 일은 그가 지닌 전문가로서의 소양을 드러내고, 지도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공동체의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어야 했다. 전문가와 프로로서가 아니라 자매와 형제로서 상호 복종하고, 상호 섬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프로와 전문가가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재철 목사님의 프로 발언에 사람들이 “‘목회자 이중직’ 부정적 견해에 개척교회 목회자 ‘현실 모른다’ 일축”이라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지적을 한 박영돈 교수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재철 목사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목사의 견해는 지난 세대에 자신의 가정까지도 희생해가면서 헌신적인 목회를 한 분들의 목회관을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도 달라진 목회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민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이분의 지적 역시 현실적이지만 성서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성서는 분명히 이재철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분이 한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이 큰 자의 길을 걸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그분은 프로였다. 그것이 그분의 문제였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자기를 온전히 비웠기 때문에 본이 될 수 있는 목사이고, 그런 목사는 프로가 아니라 가장 밑바닥, 즉 반석이 되는 사람이다.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사랑과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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