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사랑합시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30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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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니스, 제니에스, 제네스 등은 지역의 수호신들이다. 갑자기 그리스도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던 지역의 수호신을 버리게 할 수 없어서 그 지역 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가 인정하는 하나의 성인으로 삼아 숭배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어제 쓴 글 가운데 일부이다. 위 글, 두 번째 문장의 주어는 누구일까?

주교들이 모여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밀란 칙령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유의 선포로 이해한다. 그러나 밀란 칙령은 그리스도교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제국을 위해 존재했으므로 특별히 박해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주님인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밀란 칙령은 결국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도 허락된 것이지만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자유로 이해하게 된 이유이다.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종교의 최고 사제가 되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지역신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성인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종교의 최고 사제였기에 가능한 사고이며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이런 일에 반대해야 했지만 그들은 이미 세례를 베풂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누스의 행위에 반대할 명목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복음을 떠나 모든 종교는 물론 로마라는 제국의 하부구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가 바로 그렇게 변질된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 변질된 그리스도교가 복음과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지적하면 내가 늘 경험하고 있듯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식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뿐이다.

아무도 돌아서서 본래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막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어떤 그리스도교였는가를 생각해보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순교의 대열이 이어졌던 그리스도교였다.

또한 이와 똑같이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변질되지 않은 그리스도교를 이어온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들이 변질된 그리스도교에 의해 이단 판정을 받은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박해하는 그리스도교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그런 그리스도교에 존재하는 박해라는 폭력은 스스로 그리스도교가 아님을 온 천하에 천명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왜 보지 못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다. 폭력으로 보이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폭력 역시 인간으로 인한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위탁된 폭력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유일한 존재이시다. 그래서 유대그리스도교에서 폭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변질의 이유,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변질을 합리화하여 변증한 이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키케로, 호르텐시우스, 성서, 마니교,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 등에 차례로 영향을 받았다 그런 그가 회심했지만 그가 방황하던 시절 그가 배운 것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각종 이교의 최고 사제였던 콘스탄티누스와 그가 어울릴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는 395년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특히 그는 죄가 사람을 너무 부패시켰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그를 믿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후에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 그를 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에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조와 관습들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의 위대한 명성은 그가 빚어낸 오류와 해로운 가르침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오직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만, 또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구세주와 죄인 사이에 인간이 만든 체계를 끼워 넣는 것은 복음의 계시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친히 “내게 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느 성직자나 교회도 그 사이에 끼어들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교리의 다양한 모습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거듭남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성도들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일치에 대한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성물의 사용을 조장하고 연옥에 대한 신앙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과거에 로마가 초기교회 성도들을 핍박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박해를 행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 비록 선한 의도였지만 온건하고 정열적인 그가 성서의 원리를 떠나 광범위한 박해 조직에 연루되었다.

모든 종교의 최고 사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잠식하고 이방 종교와 섞이도록 한 것에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이후 그리스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교리의 종교가 되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쟁취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들을 이용하기 위해 뇌물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위의 내용에서도 보듯이 박해라는 폭력을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에 의해 ‘정당한 전쟁“ 이론이 만들어진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이 내용에 모든 것을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대원칙이 들어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율법을 하나로 묶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요약해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오직 유일한 교회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랑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히려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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