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관한 소고小考
자살에 관한 소고小考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7.0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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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살에 관한 한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고인이 자살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장례식을 집례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글에서 그분은 삼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자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은 촉구했다. 삼손의 행위도 자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그분의 입장은 단호하지는 못했다. 물론 나는 이해한다. 제도권에서는 무엇이든 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가는 교리와 법의 잣대에 의해 무참하게 징계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 기존의 입장에 동조하는 교인들 역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들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나는 기껏 옳은 내용을 잘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죽을 울리다 마는 것이 제도권에 속한 대가이자 얼버무림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호한 태도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목사들의 숙명이 되었다.

나는 이십 여 년 전에 자살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있다. 하도 오래된 설교라 원고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때 내가 그 설교에서 사용했던 예화의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한 죄수가 탈출이 불가능한 섬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그 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이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지옥과 같은 삶이었다. 가혹한 삶을 견딜 수 없어 바다로 뛰어들면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살이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죽은 후에 지옥엘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바다에 뛰어들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의 삶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묘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동료 죄수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동료 죄수를 살해하면 당연히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면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죄수를 돌로 쳐 죽이고 사형을 당했다. 그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생각을 해보라. 바다에 뛰어들면 지옥엘 가고, 동료 죄수를 죽이면 천국엘 간다는 사고가 정상적인가? 아무도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공고하다. 이 질문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런데 이것이 성서가 이야기하는 내용인가?

나는 오래도록 자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어떤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내가 발견한 근거가 되는 기사는 가롯 유다에 대한 기사와 더불어 베드로에 관한 기사였다. 주님을 배반한 것은 가롯 유다만이 아니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 둘 모두 분명하게 주님을 배반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한(회개를 상징하는) 후 주님이 명하신 대로 디베랴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주님을 다시 만나 주님의 양을 먹이게 되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판 돈을 당국에 도로 돌려주려 했지만 실패한 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다.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교회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 회개하지 않고 죽은 것일까? 가롯 유다는 자살을 통해 회개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가롯 유다가 회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교회의 입장은 내 생각과 다르다. 가롯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죽었다. 자살은 주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자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이 매우 편협하거나 유치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자살에 대한 교리의 근거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학자적인 소양도 없고, 이런 일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동료 학자도 없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가르침과 도움은 성령의 도우심밖에는 없다. 이것이 (자의적 해석으로 인한)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을 감안하고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에 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은 결코 바람직한 방식으로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삼손의 경우만이 아니라 박해에 대한 모든 순교는 어느 정도 자살에 대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엔도 슈사크의 소설 <침묵>에 등장하는 로드리고 신부를 생각해보자. 바닷물에 잠겨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위해 그가 성상을 밟은 행위는 옳은 것이었는가?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는 괴롭다. 그러면 그가 괴롭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물론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포기하고 성상을 밟아야 했는가? 과연 그것이 옳고 그것이 주님에 대한 충성일까? 나는 이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해보자. 로드리게스 신부의 두 번째 선택은 자살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삼손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는 자살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가롯 유다의 자살 역시 이런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개연성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것을 실천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는 체포될 것이라고 성령이 알려주었다. 여러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위의 말씀대로 했다. 그의 이런 결정은 자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결박에 응하기로 했다.

나 역시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동의한다. 함부로 자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무조건 자살하면 지옥엘 간다는 교리에는 반대한다. 장례의 집전을 거부한다는 것에는 더더욱 반대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지만 생명은 주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다. 교회는 과도하게 생명에 관한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생의 모든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지려 해서도 안 된다. 자살 문제의 경우에도 동일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자살과 관련하여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짜 자살이다. 성서는 자살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짜 자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자살에 관한 정의正意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살을 하지 않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멸망의 대로를 따라 멸망에 이르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자살이다!!!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어떤 문으로 들어갔는가?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 멸망의 대로를 신나게 달리면서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경성해야 한다.

얼마나 삶이 힘들면 자살을 선택했겠는가? 자살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자살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장례조차 치러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사람들을 죽어서라도 따뜻하게 보듬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살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자살한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자살한 고인 앞에서 진정한 애도를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닐까?

자살은 자살한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했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죄악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나는 한 사람의 자살 앞에서 이런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생명에 관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도리에 따라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자살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좁고 험한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자살을 방지하는 역할까지 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긍훌과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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