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7.0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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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스승들은 하느님께서 빈자에 대한 환대를 명하신다고 말하며, 이슬람교 국가들에서는 지금도 빈자에 대한 환대가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는 환대의 의무가 가르쳐지지도 수행되지도 않고 있다.”-피터 모린-

나는 피터 모린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인간도 영원한 나의 스승으로 삼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지만 누구를 나의 스승으로, 그것도 영원한 스승으로 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옳을 수 있는 것 역시 일정한 시공간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나의 스승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다.

이런 나를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그렇다. 나는 건방지다. 그러나 나는 내가 건방진 것을 알고 늘 경성한다. 내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할 뿐이다. 이런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고, 또한 부분적으로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살아낼 수 있다. 그런 내가 가장 공감하는 말씀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지금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낫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알고 있다. 사실 이것이 참 어렵다. 우리나라는 특히 성령운동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처신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능력으로 자신을 높인다. 또 그것으로 돈을 많이 번다.

나는 성령운동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은지, 돈을 많이 벌고 있지 않은지(얼마나 가난하게 사는가를 봄으로써)를 살핀다. 사실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는 이 두 가지로 판단할 수 있다. 왜 오정현이 영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지 아는가? 자신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그는 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성령이나 재림예수라고 말하는 이단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내가 피터 모린의 글을 인용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맞다. 이슬람의 스승들은 빈자에 대한 환대를 강조한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의 중흥의 원인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이것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실천했다면 이슬람은 생겨났더라도 크게 부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환대의 의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은 발현하고 부흥했다.

그러나 나는 환대 자체가 복음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은 무조건적인 환대를 요구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사랑의 가장 현저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항상 음식이 남는다. 그것도 좋은 음식이나 가장 맛있는 부분이 남는다. 이유는 부모인 우리가 자식들이 먹도록 좋은 음식을 눈치껏 먹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인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항상 가장 좋은 부분을 먹지 않고 남긴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일정부분 먹은 후에 음식을 똑같이 나눈다. 그래야 우리 집 음식은 남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사위 될 후보자들과 음식을 먹을 때 그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가를 살핀다. 맛있는 것을 골라 먹는다고 뭐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좋은 방법이다.

특히 새우나 게와 같은 것을 먹을 때 우리의 특징은 여지없이 강조된다. 껍질을 까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우리 가족의 습관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말린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말린다고 종식되지 않는 우리의 습관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그것을 받아드린다. 그것은 새우나 게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대, 특히 빈자를 환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우리말에도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에 살아있던 공동체성을 상징한다. 콩 한 쪽을 나눈들 허기가 가시겠는가? 그 까짓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콩 한 쪽을 나눠 먹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사랑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환대는 중요하다. 환대는 복음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바로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공동의 소유’는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다. 나는 공동의 소유야말로 복음이 말하는 형제애의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오늘날 ‘공동의 소유’가 이루어지는 교회가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들은 우리가 오늘날 보는 건물에서 예배를 드릴 때만 모이는 교회들이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단들이 공동체를 잠식했지만 공동체는 이단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복음적인 교회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다. 변질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를 장악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공동체가 이단들의 특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대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환대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교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른 방식이 될 수 없다. 무조건적인 환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환대란 오직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환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오래 기간의 그런 노력을 통해 내가 더욱 그리워하게 된 것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공동체인 교회이다. 그런 교회에서는 굳이 환대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환대를 가르칠 필요조차 없다. 그들에게는 이미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과 습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터모린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결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목표(Christendom)로 삼는다. 바로 그런 변질된 복음에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고,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없다. 聖市도 없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도 없다.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공동체는 울타리가 없다. 애초에 그것이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인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환대는 복음의 뇌관을 터뜨리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그 빛이 세상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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