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본
성서와 본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7.23 04:4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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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행위를 무가치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교리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안에서 행위가 사라졌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행위가 사라지면 믿음도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이 더 할 수 있는 것(행위)은 없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여기에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거나 “공로신학”을 말하려는 사람이 되어 배척을 받거나 정도가 심하면 쫓겨나야 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 한 분은 <열매로 알리라>라는 책을 냈지만 그분에게 구원과 관련된 행위에 대해 물으면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대답이라도 하고 그것이 알려지면 그분은 신학교 교수 자리를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구원과 관련된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무엇인가 토를 다는 사람은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곳에 머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이현필 선생이나 최홍종 목사, 그리고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이나 서남동과 같은 해방신학자들은 행위가 특출난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은 정통을 주장하거나 개혁신학임을 표방하는 모든 곳에서 이단으로 언급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들을 언급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는 속한 곳에서 파문의 위협에 처한다.

나는 이런 그리스도교를 우려한다. 배제와 파문 등은 전형적인 폭력이다. 그런 사람들은 신학이 잘못되면 그리스도교가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한 그리스도교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켜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그리스도교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이루어져왔다. 물론 신앙의 자유 이후 국가와 혼인한 변질된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이기적인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로서 그런 선택이 있었다.

나는 아미시 사람들이 이러한 그리스도교에 말없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미쉬는 세계 그리스도교역사에서 가장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지켜온 아나밥티스트의 한 갈레이다.

무슨 이름이든지 ‘~~파’라는 명칭은 이단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보고밀파, 발도파, 재세례파 등은 모두 정통을 자처하는 곳에서(주로 가톨릭)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발도파 사람들을 발데시안이라 부르고 재세례파를 아나밥티스트라고 부른다. 당연히 나는 발데시안이나 아나밥티스트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나는 아미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들이 성서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집에 성서를 두지 않는다. 이들은 성서를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에 보관한다. 마차를 타고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성서를 꺼내 사용한 후 다시 그것을 마차에 둔다. 대신 아미시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것은 《순교자의 거울The Martyrs Mirror》이라는 두꺼운 책이다.

아미시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겪은 고난과 순교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이 책을 읽고 또 읽어 2천여 명 가까운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내면에 새긴다. 그렇게 순교자들을 본으로 마음에 새긴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신앙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의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조상들이 선택했던 길을 선택하고 초연하게 그 길을 간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복기를 하거나 축구선수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동작을 날마다 보고 그것을 연습하는 것과 같다.

이들이 성서를 집에 두지 않고 일상에서 성서를 보지 않고 성서공부를 장려하지 않는 이유는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허한 자세를 자칫 흩트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자칫 이 일을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염려가 없는 것은 이들에게 말씀이 육화된 순교자들의 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들은 성서의 말씀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말씀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경우만이 아니라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육화된 말씀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가르쳤다. 육화된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행위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를 연구하는 신학자인 앨런 크라이더는 그것을 “아비투스”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아비투스(habitus)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브루디외에게서 차용한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관습을 통해 구체화되고 습관화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반사 행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아비투스는 성서의 말씀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미시 사람들이 성서를 집안에 두고 읽거나 배우지 않고, 《순교자의 거울The Martyrs Mirror》을 읽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읽어주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순교자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봄으로써 말씀을 육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아비투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서를 많이 읽고, 성서공부를 많이 하고, 심지어 제자훈련까지 하는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본이다. 본이란 행위이다. 본받는다는 것은 행위를 보고 그 행위를 따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배우는 방식이 본받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본받기를 버리고 직접 말씀을 읽고 배우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 이제 아미시를 통해 그 결과를 비교해보라.(어제 내 글을 읽어보라) 니켈 마인즈 총기난동을 통해 드러난, 작은 소녀로부터 어른들과 공동체 전체에서 드러났던 놀라운 그들의 신앙은 성서읽기나 성서공부가 아니라 본받기를 통해 이루어진 아비투스였다.

아미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순종’과 ‘겸손’ 그리고 ‘간소함’을 강조하며,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을 그들 공동체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삶이란 성서 보고 또 보고, 열심히 성서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소박하고 검소하며 감사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본받기의 위대함과 필연성을 아미시에게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만들어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비극이다. 순교자들은 아미시의 책 제목처럼 거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했던 신앙 선배들의 신앙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쳐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의 삶이 자신의 아비투스가 될 때까지 반추하고 또 반추해야 한다.

그 길을 갈 때 성서는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세상은 그런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오게 된다. 자신들의 존재로 그것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어준 아미시 사람들이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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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현 2023-07-24 08:29:28
마지막으로, 최목사님은 "배제와 파문 등은 전형적인 폭력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을 배제하고 파문하여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방어이지 폭력이 아닙니다.
저는 해방신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 뉴스엠에 나왔던 어느 기사를 기억합니다. 어떤 신학생이 대표기도를 하며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했고 징계를 받았다는 내용을 소위 신학교수라는 분이 소개하며 그 신학생이 새로운 것을 시도했기때문에 좋다고 쓴 글이었습니다.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니... 이게 해방신학 맞지요? 성경의 내용을 교묘하게 재해석하여 "해방"이라는 민중운동같은 논리에 짜맞춘 것이 어떻게 신학이 될 수 있는지요? 최태선 목사님이 이런 분이신 줄도 여태 몰랐습니다. 이단인 것 같습니다.

이충현 2023-07-24 07:32:20
저는 아미쉬는 모르지만 이 글로 봐서 아주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하지만 아래 제가 쓴 대로 그들도 죽어 예수님 앞에 섰을때 아마도 "난 너희를 모른다"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고 복음서를 읽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 순교자들의 모습만 읽고 따릅니다. 이들이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도 이들은 예수님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도 이렇게 경건하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모든 율법을 외우고 하루에 세번 기도하며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결국 예수님을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 없는 경건, 거룩이 어떻게 예수님께 인정받겠습니까... 왜 최태선 목사님은 예수님 없이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이충현 2023-07-24 05:38:07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냐는 뜻입니다. 즉, 누가 어떤 애를 아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애에게 먹을 것도 안주고 보살피지도 않고 안아주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진짜 아버지인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길을 물어서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대답했는데 그가 감사하다고 하며 다른 쪽으로 간다면 그는 과연 내 말을 믿은 것일까요? 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예수님 말씀에 전혀 신경 안쓰고 읽지도 않는다면 그는 사실 안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충현 2023-07-24 05:32:47
구원은 우리의 행위, 즉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나름 착하게 살았다 해도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만 구원을 받습니다.

불교나 이슬람, 힌두교에도 성자들은 있고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착하고 거룩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죽어 심판대 앞에 섰을때는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이었던가를 깨닫고 지옥으로 떨어져도 아무 말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착하게"는 우리 기준으로 착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마음에 잠깐 음욕만 품어도 너무도 깨끗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바보라 부르면 지옥행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