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터라이트의 설교
후터라이트의 설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8.0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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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 아나밥티스트협회(KAC)를 찾아간 것은 내 기억으로는 2010년 정도였던 것 같다. 아나밥티스트에 대해 알게 된 후 나는 한국에도 그런 곳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나는 그곳 사람들과 알게는 되었지만 깊은 교제는 나눌 수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아직 때가 안 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곳에서 책을 몇 권 사왔다. 그 책들 가운데 하나가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오자 마자 책들을 다 읽었다. 그러나 그 책들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내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최근 나는 아미시에 매료되어 아미시에 관한 글들을 썼다. 그러다 아미시와 아나밥티스트의 다른 갈레인 후터라이트가 생각나서 서가를 뒤져서 이 책을 찾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섬머셋 모엄의 <달과 육 펜스>에서 스트릭랜드가 타이티에서 느낀 기분이 아마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불렀던 찬양 김두환 작곡의 “본향을 향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냥 반가운 정도가 아니라 내 혈관의 피가 용솟음치는 듯 했다.

후터라이트 설교자들은 예배시간에 설교자에 의해 읽혀진다. 공동체의 훌륭한 장인들이 펜으로 쓴 고딕체의 독일어 필사본으로 가죽 끈으로 멋지게 묶여진 설교집의 설교를 설교자가 독일어로 읽는다.

“재산은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에 속한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탐욕과 이익이라는 자기중심적인 길로 간다. 그러한 것에 우리를 순응시켜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와 함께 소유하는 것,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 그와 함께 고통을 받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든 것을 견뎌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 사랑의 결속은 짐승들로부터 사람을 구별해 내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하늘은 공동의 생활 상태에서 그려지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아무런 소유권이 없으며, 그런 까닭에 거기에는 참 만족과 참 평화와 축복이 있는 곳이다. 만약 하늘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이라도 갖기를 원한다면, 그는 내쳐지게 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설교의 내용들이다. 한 주제, 한 주제를 깊이 생각해보라. 얼마나 명료한가? 그들은 이런 내용들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 그들은 공동체 속에서 이런 것들을 실천한다. 다시금 복음이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하는 내용들이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런 내용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혼자서 이런 내용들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되었는가? 이런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함께 사는 그런 공동체가 없다.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내용들에 관심을 갖고 가능한 것을 실천하며 살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터라이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가르치지만, 자신들의 믿음을 확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비적인 경험을 찾거나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의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개인들의 평화를 추구한다.

후터라이트들에게 공동체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위에 인용한 설교의 내용들이기도 하다. 오늘날 개인주의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나 들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즉각적으로 이단을 연상하게 되어있다. 개인주의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변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미시에 관한 글을 써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나 골동품 정도로 인식한다. 그들은 골동품이 아니라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이다.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고,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아미시나 후터라이트와 같은 사람들을 골동품이나 오래 된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개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재산이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교도에게 속한 것이라는 설교는 내게 인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연습해왔다. 우선 나는 공동의 소유를 위해 내 재산을 내어놓았던 경험이 있고, 그것이 다 사라진 후에 내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왔다. 내 소유를 버리고 하늘 바라보는 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하늘은 내게 실망시킨 적이 많지만 그런 경우는 그것이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 나는 안다.

이중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족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을 한다. 내가 바로 가족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기회도 사양했다. 나는 돈을 버는 대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책임져주셨다. 만일 내게 공동체가 있었다면 하나님 대신 공동체가 내 짐을 대신 져주었을 것이다. 공동체가 없는 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 짐을 대신 져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내게 꼭 필요한 돈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도달한다. 아는 사람인 경우도 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 경우도 있다. 특히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 내게 도달하는 도움은 내가 절망하고 있는 시간이거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최근에도 나는 그런 도움을 경험했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은 나그네에게 냉수 한 사발을 대접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절묘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려 해왔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런 관계가 좋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는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상대방과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런 도움을 나그네로서 내가 받은 냉 수 한 사발로 여기기로 했다. 떠나면 그만이고 한 번 마시면 그만인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내 삶의 여정 내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가지게 된 모든 것을 한 사발의 냉수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는 오늘 글에 인용한 후터라이트의 설교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기억하시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후터라이트에 관한 소개나 해설은 다른 글에서 할 것이다. 인용한 내용 하나, 하나는 모두가 주제를 삼아 따로 글을 써야 할 내용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나는 성서 대목이 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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