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Christians Living in the Anger Society)
“분노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Christians Living in the Anger Society)
  • 김영봉 목사
  • 승인 2023.08.15 2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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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와싱톤사귐의교회) 8월13일 주일예배 설교문
성경 본문 : 아모스서 4장1-5절 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돌아오지 아니하는 백성 이스라엘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병 든 세상

며칠전, 한국 뉴스를 읽다가 분당의 서현 역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을 접했습니다. 2023년 8월 3일,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서현 역의 한 백화점 앞에서 어떤 청년이 차를 몰아 인도로 돌진하여 두 사람에게 부상을 입힙니다. 충돌로 인해 차량이 파손 되자, 범인은 바깥으로 나와 칼을 휘두르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열세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범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희생된 것입니다. 목숨을 잃은 여성의 남편은 “그 사람이 내 첫 사랑이었다”면서 목놓아 울었다고 하지요.

서현역 흉기 난동의 피해자 고 이희남씨 @ 사진 KBS, 갈무리.

서현역 흉기 난동의 피해자 고 이희남씨 @ 사진 KBS, 갈무리.

사건을 ‘묻지 마 범죄’라고 부릅니다. 보통 칼부림 사건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에서는 총기 사용이 불법으로 되어 있어서 칼을 사용하고 미국에서는 총을 사용한다는 차이 뿐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나는 총기 사건에서도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묻지 마 범죄’가 이렇게 심해지고 있는 이유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자신에게도 있지만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사회에도 있습니다. 이 현상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분노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뜻입니다. 정치, 경제, 교육, 사법,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부정과 불의와 부패 현상이 심해져서 국민들의 분노 게이지가 폭발점을 향해 치솟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책을 내면서 <분노 사회>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양극화가 심화 되어 대화와 타협과 협의의 미덕이 사라졌습니다. 국민들에게 필요한 일들은 산적해 있는데,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정치인들 중에 책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는 법인데,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은폐하기 급급하고, 하급 직원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웁니다. 공적 책임을 맡은 이들이 국민 앞에 나와서 세살 어린 아이도 속지 않을 말로 변명을 합니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속에서 불이 납니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 체제에 정의와 공정이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천민 자본주의’ 혹은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가진 사람은 더 쉽게, 더 빨리 재산을 불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갈수록 절망적인 상태에 이릅니다. 사법 정의가 왜곡되어 법은 더 이상 약자를 보호하는 수단이 아니라 강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소위 ‘법 기술자들’에 의해 법이 오용되고 악용되어 왔습니다.공권력도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오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때로 묻지 마 사건으로 표출되곤 합니다. 정의와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은 절망 속에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돈을 물쓰듯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 혼자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럴 수 없으니 결국 칼부림과 총부림으로 분풀이를 하는 겁니다.

그런 범죄를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그런 범죄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흐르거나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납니다. 콧물이나 기침이나 열은 몸의 면역성이 떨어져서 생겨나는 증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증상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하면서 몸 전체의 면역성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처럼, 묻지마 범죄는 우리 사회에 문제가 생겨서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우리는 그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모스를 부르신 이유

이 문제를 마음에 두고 기도하며 묵상하다 보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때문이고, 우리 사회가 그토록 심하게 망가졌다는 사실 때문이며, 이 분노 사회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모스서를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할 당시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상황이 지금 우리의 상황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 안에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저는 차분히 앉아서 성령의 조명을 구하고 아모스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아모스는 주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드고아라는 시골 마을에서 양떼를 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에게 북왕국 이스라엘로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로 비유 하자면, 서울 근교에서 소를 기르던 농부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북한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 때가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을 다스릴 때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41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국경을 넓혀 다윗 왕 시대의 영토를 거의 되찾습니다. 남왕국 유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경제를 일으킵니다. 그 결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한 신흥 귀족이 출현합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부흥의 열매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중산층이 사라집니다.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땅 부자가 되었고, 겨울 별장과 여름 별장을 마련하여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사법 정의는 왜곡되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이권 카르텔을 만들어 힘 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가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가진 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일삼고 있던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폭로합니다.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 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쳐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암 2:6-7)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써 그들의 총체적 타락상을 드러내십니다. 정치인들은 무책임 했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정의보다 이익을 앞세웠으며, 가진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계층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윤리적으로는 깊이 타락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모두가 망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은 종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른 종교는 이런 때 눈 질끈 감고 타락을 향해 가는 세상을 깨워 일으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종교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유다 사람 아모스를 불러 북왕국에서 예언하게 하신 이유는 북왕국의 신앙인들 중에는 그럴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타락상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8절)

율법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겉옷을 저당으로 잡으면 밤이 되기 전에 돌려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2:26). 밤에는 그것을 이불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당 잡은 옷을 성전에 가지고 와서 제단 옆에 버젖이 펴 놓고 누워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며 즐긴다는 겁니다. 대 놓고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니 내 어찌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죄의 온상이 된 성전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또 누룩 넣은 빵을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알리면서 자원 예물을 드려 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4-5절)

베델과 길갈은 이스라엘이 제사를 위해 성전을 지어 놓았던 곳입니다. 따라서 “베델로 몰려가라” 혹은 “길갈로 들어가라”는 말은 제사와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 모여서 죄를 지으라고, 죄를 쌓아 올리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서 “너희”는 가진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전에 모여 호화로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저당 잡아 돌려 주지 않는 사람들이며, 신발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법과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성일이 되면 성전에 모여 호화스러운 제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죄를 쌓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뜻입니다.

5절의 마지막 말씀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그들끼리 모여 종교 예식을 통해 평안과 번영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가진 자들이 즐기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혐오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5:21-23)

세상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안실일이면 성전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이 세상에 나가 정의를 행하고 정의를 세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5:24)

깨어 있는 종교

아모스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2천 7백 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대로 오늘 우리 시대에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을 Déjà Vu, 우리 말로 ‘기시감’이라고 하던가요?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아모스를 남왕국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믿음은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망조가 들어가고 있던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급속하게 몰락합니다. 깨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잠 자고 있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 사회를 사는 우리 믿는 이들은 옛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즐겨 왔음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선택한 진영에 함몰되어 그것을 절대 진리처럼 숭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좌파에도 있고 우파에도 있습니다. 지금 아모스가 우리 중에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들에 의해 쫓겨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결국 화를 당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요?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저는 오늘 세 가지만 말씀 드리려 합니다.

첫째,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찾아 돌보아야 합니다. 법을 몰라서 혹은 법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억울하게 피해를 견뎌야 하는 사람들, 경제 정의가 무너진 까닭에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정치적인 음모로 인해 희생 당한 사람들 혹은 부조리한 의료 제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 자신의 안전만 꾀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늘 가까이 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억압 받는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희망을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찾아 돌보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기 선교를 다녀 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왔다고 고백하곤 하지요. 하나님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갈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더 가까이 만나게 되는 겁니다.

진실한 믿음을 구한다면 우리의 기도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신음이 담겨 있는지, 우리의 시간과 물질 중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부분이 있는지 정직하게 물어 볼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지 의문이 되신다면, 우리의 안전 지대를 벗어나 사회적 약자들의 자리로 내려가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써 보시기 바랍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 만남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정의롭게 되고 정의롭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깥에 있는 거대한 불의를 보느라 자신 안에 있는 불의에 눈 멀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도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라(마 7:1-5)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정의롭기를 바란다면, 나부터 정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의 정신 안에서 철저히 새로워 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저는 교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맞는지 항상 묻습니다. 자신은 불의하게 교회를 운영하면서 세상을 향해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위선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일하는 목사님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성장시키고 아무리 유명해진다 해도 함께 일하는 목사님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짜입니다. 제가 정의롭게 사는지 아닌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저의 가족과 동역자들입니다.

이 말은 제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늘 정의롭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 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항상 깨어 저 자신을 돌아보는 이유가 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늘 깨어 있기를 힘쓰는 이유는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정의에 일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합니다. 어느 조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자신의 활동 영역 안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결정으로 누군가가 억울하게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호소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정의롭고 공정해지도록 할 일을 찾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안에 정의가 자리 잡도록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권한과 권력이 주어졌다면, 그 권한과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권한과 권력 아래에 있다면, 그 사람이 그 권한과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하도록 건설적인 비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정치 권력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정의를 망가뜨리는 일에도, 망가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잘못되면 억울한 희생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희생자들을 찾아 돌보는 일에도 힘써야 하지만, 그런 희생자들이 더 나오지 못하게 정치를 고치는 일에도 마음을 쓰고 시간을 써야 합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은 정치 뉴스에 온 정신을 팔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 뉴스에 정도 이상으로 함몰되면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반대로,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끄고 살면, 권력을 맡은 자들은 그것을 오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합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 권력을 맡겨 주었다면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늘 감시해야 합니다.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투표를 통해 그에게 맡겨준 권력을 회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투표는 매우 중요한 의무입니다.

우리의 과제

민주주의는 인류가 만든 가장 좋은 정치 제도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정치 전문가들 중에는 민주주의가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진영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사람들만을 결집시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진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대화도, 타협도, 연합도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진영의 울타리를 깨뜨리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믿는다는 사람들 대다수가 진영 논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진영의 이념을 부르짖습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제대로 믿는 사람은 진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논리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진영 논리에 갇혀 있다는 말은 바른 신앙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위를 바라봅니다. 그런 사람만이 좌우를 모두 품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 안으로 파고 들어가 세상을 고치는 일에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영혼의 변화가 퍼져서 삶 전체가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들이 많아져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 분노 사회 안으로 퍼져 들어가 복음이 가진 변혁의 능력을 드러내라 하십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정의롭게 살라고,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에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할 일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성가신 일입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요 미움 받는 일이며 박해를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망했습니다.

우리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해와 혐오와 박해를 받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부름을 끝까지 따르시는 모범을 보이셨고 지금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팔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9-10)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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