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제
하나님의 경제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9.12 23: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래 전 우리 교회는 식사기도를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주기도문을 천천히 외우기로 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나라가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평화(정의)와 하나님의 경제의 풍요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목사가 없을 때 폐회를 위한 주문처럼 사용하고 있을 뿐 주기도문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경제방식에 완전히 경도되어 하나님의 경제를 완전히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어렵지 않다. 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속 시원하게 밝히고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하나님의 경제는 거저 받아 거저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이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양보할 수 없는 자기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왜곡된 현실이다.

교회는 개인 구원을 위한 방주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 회복된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어야 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관계는 물론 모든 어그러지고 왜곡된 피조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에 돈이 포함된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는 돈을 상징하는 은 금 및 각종 보석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파악하지 못한다.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총일 수 있는 것은 돈 역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돈 역시 타락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사랑과 근심, 숭배의 대상이 됨으로써 마귀의 현현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돈은 타락한 속성과 본성을 회복하지 않은 채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오늘날 교회의 불행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 돈이 공공연하게 판을 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돈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제가 의미하는 것이다. 돈은 교회 안에서는 맘몬일 수 없다. 교회의 왕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잘 안다. 교회 안의 누구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있고, 그것은 확고하다. 아무도 자신의 것을 거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없고, 더구나 자신의 것을 거저 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잘도 청지기 정신을 강조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청지기로서 살아가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기부나 자선을 조금 행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달려 있다.

생각해보라. 교회가 소멸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죽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돈이다. 교회는 돈 때문에 탄생하고 죽는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돈 때문에 살고 죽는다.

그런 교회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그저 뒷방 늙은이와 같아지셨다. 그러나 그런 실상을 보지 못하고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자신들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하셨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모습이 맘몬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장악한 모습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다. 그것은 곧 교회가 매매와 교환의 거래법칙이 작동되지 않는 곳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회는 자끄 엘륄의 말처럼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곳이 되었다. 아무리 주기도문을 외워도 그곳에 오롯이 담겨 있는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내어 쫓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간청할 때마다 그것이 바로 평화의 본질임을 깨닫는다.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더 많이 가지려는 자가 군대를 이용해 싸우려하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과 폭력, 그리고 군대와 전쟁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 의미하는 바가 평화인 이유이다. 진정한 평화는 먹을 것을 나누는 곳에 임하고 열린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 주목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곧 구원이다.

막스 베버는 루터의 소명설과 칼빈의 예정설과 같은 종교개혁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였고 인간이 무한한 탐욕의 길을 치닫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결국 기업만이 아니라 개인은 물론 교회까지 ‘이윤의 극대화’라는 맘몬의 대로를 달리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이윤의 극대화를 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절정인 신자유주의체제에 도달하였다.

신자유주의체제는 모든 탐욕을 정당화한다. 탐욕이 선으로 추앙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극단적인 소득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인간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에 이르렀음에도 인간은 자신의 쥐고 있는 소유를 놓을 수 없음으로 인해 모든 사회적 불행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이런 세상에서 전쟁은 나라와 나라의 충돌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 역시 전쟁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었고, 전쟁이 일상인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세상에서 살벌한 제로 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하나님의 경제다. 하나님의 경제는 매매와 교환의 법칙이 지배할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고, 거저 받았음을 인정하고 거저 주어야 한다.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하나님의 경제와 무관한 교회는 그래서 교회일 수 없다. 공동의 소유나 청지기 정신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복음은 복음일 수 없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와는 무관한 그리스도교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다.

이 비극을 타개하는 것은 곧 온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다. 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이 길에서 만나고 싶다. 그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다. 하나님의 경제는 복음의 도화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