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일
불가능한 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9.12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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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장을 뒤져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나 읽다가 중단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신기한 건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데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이미 읽었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없었었던 것들이 그 뜻을 열어줄 때는 행복을 느끼기까지 한다. 책이 변했을 리는 없다. 내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옛 기억과 글자들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작아졌다는 사실을 느낀다. 무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를 힘이 있다고 느끼게 만든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힘 있게 만든 것은 단연 돈이었고, 학벌이었고, 영향력이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나 자신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진정한 나를 다 알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아직도 여전히 분노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내가 아직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가 분노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대부분의 이유는 내가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거나 내가 틀렸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제도 손자를 데리고 나가다가 내가 사는 연립주택의 반장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인사를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는 경우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간 분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 할머니를 보면 인사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런 할머니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화가 났다. 한 번 화가 나기 시작하니 더 많은 것들에 대한 내 불만이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커지고 싶다. 내가 비싼 아파트에 살고, 내가 좋은 차를 타고, 내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내가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으면 그런 무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런 분노는 곧바로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나는 안절부절 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내 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기를 부인한다면 내가 느꼈던 분노나 불안감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새삼 修道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보게 해주신 것이다. 내가 수도하지 않으니 주님이 대신 그 일을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잠시 가지게 되었던 분노와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내 처지를, 아니 내 진면목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무시당하도록 작게 만들어주신 주님께 다시 감사를 하게 된다. 그것이 나를 다시 십자가 앞에 서게 한다.

“예수가 증명해 보였듯이, 이 세상은 진리 앞에서,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타협하지 않는 증언은 결국 세상의 증오심과 부딪히게 된다. 십자가는 교회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고통당하고 묵묵히 굴종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런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거둔 승리에 교회가 온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총체적인 고난과 억압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다. 반대로, 십자가는 우리가 카이사르의 현실 인식보다 하나님의 현실 인식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이자. 죽음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부정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수단에만 맡겨두시지 않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스탠리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p.67-68-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큰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우리는 자신이 단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 한다. 그것이 흙에 대한 반발일까? 그러나 우리가 흙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추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말뿐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아가게 된다. 돈과 세상에서의 성공은 그것을 잊게 해주는 강력한 痲藥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가인의 후예들이 된다. 물론 자신이 틀림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가인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하기 위한 성을 지어놓고 그것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이름 지었다. 그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혹은 ‘봉헌된 자’를 의미한다. 스스로 등 돌린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가인의 착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가인은 예배(미사)도 정성스럽게 드렸을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깊이 묵상해보라. 위의 내용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증오와 부딪힐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멸시와 천대는 세상의 증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오를 이겨내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에 온 몸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호의호식을 꿈꾸며 사는 한 우리는 가인의 에녹 성을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총체적인 고난과 억압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다. 반대로, 십자가는 우리가 카이사르의 현실 인식보다 하나님의 현실 인식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가난을 좇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경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할 때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이자. 죽음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부정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수단에만 맡겨두시지 않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통해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무방비가 될 때 하나님의 불 성곽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역설을 우리의 삶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예루살렘 안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져서, 예루살렘이 성벽으로 두를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 바깥으로는 내가 예루살렘의 둘레를 불로 감싸 보호하는 불 성벽이 되고, 안으로는 내가 그 안에 살면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이 예언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작아져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 성의 주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가인의 후예들에게 이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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