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
행복은 어디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9.2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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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가 추석주간이다. 손자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 폐지수거하시는 할머니를 만나 돈을 드리고 왔다. 이젠 내가 돈을 드리려고 하면 그 할머니도 주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가난한 분들은 다 이렇다. 돈에 저항할 수 있으려면 가난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돈에 저항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은 무용지물이 되고 성서는 폐휴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며칠 돈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돈 이야기 앞에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보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그런 그리스도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냥 나라도 열심히 돈을 미워하는 길을 가야 한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돈에 관한 우리 가족들의 결정이 빛을 발한다. 우리는 돈에 충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돈을 무시한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삶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우리 가족들의 그런 결정들을 바라보며 주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그냥 어려운 시간을 지내온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우리를 변화시켰다. 그 변화는 무척 더딘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이 주시는 내 모든 시간을 감사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은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사람들의 인정에 목마를 필요가 없다. 때론 버림을 받아도 좋다. 그 버려짐 자체가 내게는 꼭 필요한 자극제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내가 나에게 연연하지 않는 한 버려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긴 시간을 지내오는 동안 배운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것 자체가 내겐 은총의 시간이다.

딸이 내게 결혼식 축사를 하라고 했다. 나는 일절 결혼식의 순서를 맡지 않겠다고 했지만 돌고 돌아 결국 내 차지가 된 것이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보았다. 생각이 대강 정해졌다. 결혼은 힘든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힘든 삶들이 나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사랑을 배우게 된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독신인 신부님들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서세원의 장수 퀴즈의 내용을 인용할 생각이다. 할아버지에게 카드가 전해지면 할아버지는 카드에 적힌 단어를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해야 한다. 할아버지에게 전해진 카드의 글자는 천생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을 뭐라고 하지?”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할머니는 “웬수”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크게 웃었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아니 네 글자”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평생 웬수”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그 문제를 맞히지는 못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웃기지만 인생의 실존적인 교훈이 담겨 있다. 나는 천생연분과 평생 웬수가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그리고 사랑했지만 부부는 원수가 된다. 나는 그것이 장수 퀴즈에 나왔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랑하면 원수가 된다. 그러나 그 원수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생 웬수는 천생연분의 뒷면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고슴도치의 딜레마도 이런 인간의 실존을 비유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시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찔린다. 그럼에도 그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낭만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 찔린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하면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이야말로 인생의 훈장이다.

장수 퀴즈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사람들은 모두 원수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원수다.

원수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면 원수가 사랑스러워진다. 사실상 철천지원수가 된 사람보다 이렇게 가까운 원수가 더 사랑하기 어렵다. 나는 그것을 아미시 총기 사건을 기록한 책에서 보았다.

아미시 학교에 총기를 여러 정 가지고 난입한 범인이 열 명의 아미시 소녀들을 인질로 잡았다. 목적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범인은 총기를 난사하여 다섯 명의 소녀를 살해하고 나머지 소녀들에게도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다. 이 사건은 곧 바로 알려져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이 전국에 중계되었다.

죽은 소녀들과 부상 당한 소녀들은 여러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들을 포함하여 아미시 사람들은 죽은 범인의 가족을 찾아가 위로를 하고 범인의 부모를 안아주었다. 범인의 가족에게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도 나눠주고, 범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그런 아미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범인의 가족들은 아미시 사람들을 “검은 옷을 입은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내용에 아미시 사람들이 한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기 자녀를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사소한 일로 갈등을 빚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는 내용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내용이었지만 나는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미시에게 어려웠던 일이 장수 퀴즈에 나왔던 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랑하면 누구나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이야말로 인생의 훈장이자 면류관이다. 그 아픔은 자신의 아픔을 넘어 다른 이들의 아픔까지도 보듬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긍휼이며 공감이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바로 이 긍휼한 마음이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여권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굥과 그를 추종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도무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보아두었으면 좋겠다.

복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연해 설명하면 가난은 사람을 작게 만들어주고 작아진 사람들만이 서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작아진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반대로 돈과 권력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어 공감의 능력을 사라지게 만든다(오만증후군). 그러나 사람들은 이 평범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리고 찌루찌루 미찌루와 마찬가지로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맨다.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바라는가. 자신의 삶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잘 생각해보라. 당신의 생각과 반대의 현실이 오히려 자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이해하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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