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평화
구원과 평화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0.0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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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오래 살면 부부가 닮게 될까? 그리고 그것이 얼굴로 드러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늙으면 선명한 개성이 사라진다. 노인들 가운데 미녀나 미남은 없다. 주름과 노화된 피부가 그것을 사라지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주름의 모양은 달라진다. 많이 웃은 사람과 많이 인상을 쓴 사람의 주름은 확연히 다르다. 주름만이 아니다. 표정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근엄해진다. 때론 근엄함을 지나 분노에 찬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다. 얼굴에서 친절함과 따듯함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실제로 부부를 닮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현상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오래도록 사랑한 사람과 이기적으로 산 사람의 얼굴은 다르다. 그리고 그런 표정이 노인들에게는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된다. 어떤 부부가 닮았다는 것은 그 부부가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부부가 닮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부부들은 갈등관계이다. 이 갈등관계에서 합의를 이루어낸 부부는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닮을 수 있다. 그러나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불평등 관계로 살고 있는 부부는 닮기 어렵다. 한 사람은 만족하더라도 다른 한 사람이 만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같이 살아도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경우는 부부가 평화롭게 잘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랑의 속성이 드러난다. 사랑하면 똑같아진다. 나는 이 사실이 정말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부모의 사랑과 같이 일방적인 사랑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대부분은 균형을 이룬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희생한 경우라도 일정 시점이 지나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리사랑은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은 상대방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도 그 사랑을 배우게 된다. 내리사랑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내리 사랑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른 짐승들과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늘 그것을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나는 딸들이나 사위, 이제는 손자에게까지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먹게 한다. 아직 손자 녀석까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딸들이나 사위들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늘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서로 양보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양보한 것을 서로에게 권하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일종의 합의에 도달한다. 똑같이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좋은 것을 똑같이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이 모습에서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진정한 평화란 같은 것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평화란 단순히 폭력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본 이야기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언제 평화가 오겠습니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자매와 형제로 보일 때가 그때이다.” 스승이 대답했다.

사실 처음 이 이야기를 보았을 때는 이 이야기가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실감난다. 그리고 이렇게 온 인류가 자매와 형제의 관계가 되는 것이 평화의 온전한 구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바로 복음의 중핵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방편이 되는 것은 평화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도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좋아한다. 오후 늦게까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처럼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게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능력이나 들인 노력에 상관없이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경쟁의 세상 속에서 경제논리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어라’라는 하나님의 경제가 실현되는 것이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내용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지를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리고 이제 나는 주님이 우셨던 이유를 안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은 평화가 없는 불의한 곳이 되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평화는 단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평화는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올무에 빠져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맹平和盲이 된 것이다. 내 귀에는 주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눈에는 울고 계시는 주님이 보인다.

나는 며칠 전 딸의 결혼식에서 두 아이에게 평화를 빌어주었다. 식에 참석한 하객들과 함께 부부가 된 두 사람을 위한 샬롬을 기원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평화롭게 잘 살라는 의미를 넘어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기 원하는 내 마음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심고,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구원’을 개에게나 주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 평화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 평화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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