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것
주님의 것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0.11 0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의 결혼식을 전후하여 몇몇 목사들을 만나기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은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청첩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만남과 통화를 통해 확인한 것은 그분들의 나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분들은 내가 하고 있는 글을 쓰는 일이 의미 없지는 않지만 내 글의 내용을 실천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토로했다. 물론 나를 인정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하는 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크다.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일부만을 드러내거나 혹은 오히려 가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일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중심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하는 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글 쓰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어 사람들이 아쉬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쓰는 글이 현실에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나와의 관계를 끊기도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다만 글 쓰는 일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나는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은 여러 용도로 작용하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의 일부일 뿐이거나 주님이 내게 주시는 가르침 혹은 나의 깨달음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기간 동안만 나에게 절대적인 생각이며 지식이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주님이 내게 계시지 않다면, 혹은 내가 주님이라고 믿고 있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존재 의미, 내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정말 그렇다면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다면,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나는 내가 하는 일과 상관없이 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물론 나의 주님이신 그분이 내게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시면 나는 생명을 드리며 그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내가 하는 일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일로 나를 판단하는 일을 거절한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라야 주님은 그런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따릉이를 타고 도림천을 달린다. 개천을 따라 복개된 도로 아래를 달리다 보면 그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된다. 노숙자 선생님이시다. 나는 그런 분들이 보일 때마다 그분들에게 식사 한 끼를 사드리고 싶다. 하지만 그 일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것은 차를 타고 지나갈 때보다는 상황이 여의하지만 걸어갈 때와는 다르다. 멈추어서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노숙자 선생님을 지나치면 항상 내 마음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예수님을 대접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늘 있다. 가난한 분들이나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돕고 싶은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목사가 되었지만 나는 그런 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복음이 복음이 되려면 내가 복음이 되어야 한다. 내 삶으로 반복해서 복음을 보여주고 그 복음을 보고 내 삶의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은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가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다른 것은 목사로서 내가 베드로와 같이 반석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공동체인 교회의 터가 되고 주님의 몸으로 세워진 공동체를 통해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그 일을 하고 싶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그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하기 원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신앙을 나누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그분의 유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일도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자유롭게 나누지 못하게 제약하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부의 예산을 받는다든지 다른 단체나 심지어 교회의 도움조차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이외의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사람을 의식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때만 그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노숙자 선생님들에게 턱시도를 입혀드리고 스테이크를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노숙자 선생님들에게 턱시도는 불편한 옷이다. 또 이가 없거나 시원치 않은 노숙자 선생님들에게 스테이크는 그림의 떡이라는 걸 잘 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분들이 정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분들이 느낄 수 있게 해드리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이런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거나 이런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시도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일을 원하신다면 어떤 식으로도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이다.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분 안에서 자유를 느낄 때라야 그분은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이다.

내게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종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늘 주인으로 행세한다.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오늘도 한 페친의 글에서 유명한 오정현 목사님이 우리 국민의 50%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일을 할 것이라는 내용을 읽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내가 방금 말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가인의 후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실 때조차도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보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순종에의 의사표현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진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게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찾아 하고 있다. 그것도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내면화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오히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처럼 스스로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내가 주님의 일을 하도록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나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것이며 참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바울 사도와 같이 똑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