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사제들은 시국기도회를 열고 미사를 드린다.
천주교 사제들은 시국기도회를 열고 미사를 드린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0.31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시국기도회를 열고  미사를 드린다.

나는 이 사실이 항상 부러웠다. 그리고 오래도록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왜 가톨릭은 시국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가들의 잘못을 준엄하게 질책하고 그 책임을 묻는데 왜 개신교는 반대로 정치가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는가. 개신교 목사로서 늘 그것이 부끄러웠고 또 사제들의 용감한 행위에 대해 부러웠다.

왜 가톨릭 사제들은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는 시국미사를 드리고, 개신교 교회는 대통령의 요구에 가짜 예배(10·29(이태원) 참사 추모 예배와 같은)를 드리도록 허락하는가.

나는 이 두 사실이 공히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먼저 가톨릭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실 가톨릭은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국가와 혼인한 그리스도교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권력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조직인 권세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교황과 황제가 서로 다투는 일이 빈번했다. 그것은 서로가 더 높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며 실제로 누가 더 큰 권력을 가지는가를 가리는 일이었다.

오늘날 가톨릭은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래서 국가가 잘못하는 경우 가만 있지 못한다. 이것을 정의로운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세상의 정의이다. 세상의 정의는 사실상 옳고 그름이 없다. 누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가 정의의 관건이다. 힘을 가진 자의 정의가 정의이고 그보다 못한 힘을 가진 자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불의가 되는 것이 세상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하신 바 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며 판단의 기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강령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법 역시 준수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정의를 무시하지 말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강령인 산상수훈에서 이 사실을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의 정의는 따로 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마도 가톨릭 사제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 식으로 구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들거나 불가능하게 여겨지겠지만 잘못된 정치를 인정하고 잘못된 정치를 행하는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깨달아 알 때까지 그 요구를 수용하고 그보다 나아가 그 이상을 해주어야 한다. 시국미사는 일종의 힘의 대결이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이것이 시국 미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가톨릭 사제들이 시국미사를 드리는 것은 이미 관습이 된 그리스도교의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폭력의 대명사는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과 종교재판과 식민지 정복 등이 될 것이다.

개신교의 정치가 옹호 역시 이와 똑같은 맥락 속에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 보였던 이는 이명박 장로이다. 서울시장 시절 그는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참으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시장이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시장이 된 자신이 서울을 聖市(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이 거룩한 도시가 되었는가. 아마도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명박 자신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사고가 개신교의 일반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실체가 Christendom이다. 실제로 개신교 신학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깔뱅은 제네바를 성시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은 그곳의 통치자가 되어 자신의 신학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추방하거나 제거했다. 그는 부관참시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개혁이 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말 그대로 종교개혁이었다면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방점이 찍혀야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을 했다.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더 악한 종교가 되었을 뿐이다.

내가 지금 가톨릭과 개신교를 싸잡아 매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맞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성서는 이미 그리스도교의 변질을 알고 있고, 그 처방을 내리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점은 신앙의 자유(313년)이지만 그보다 조금 더 소급하여 서기 200년 이전의 그리스도교다. 서기 200년 경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아진 그리스도교는 조직이라는 치명적인 올무에 이미 빠지고 있었고, 사실 그랬기 때문에 신앙의 자유 이후에 모든 종교의 대사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주교들만을 장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세상의 하부구조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부정하는 나는 설 곳이 없다. 이제 내 글을 읽는 이들은 극소수만 남았다. 만일 내 글을 날마다 기다리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 나는 글을 쓰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하시기 전에 일꾼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버팀목들을 치우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더욱 경성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본다.

참 그리스도인은 낙심하지 않는다. 아니 낙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혼자가 되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된 것에서 힘을 얻는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