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근원과 뭇 민족의 빛
복의 근원과 뭇 민족의 빛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0.3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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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계약(언약)에서 그 계약의 성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전제가 있다.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신학이 하나님의 신관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 이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교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 나는 언제나 이 사실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도외시하고 인간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일쑤다.

그래서 신앙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멈춤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멈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일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스스로 선악을 가리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이야말로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위가 된다. 그러나 조급한 인간은 상황에 반응하여 무엇이라도 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난과 환난이 부각된다. 인간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하지 않고 기다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 기다리지 못하는 존재를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난과 환난이다. 나는 오랫동안 가난 속을 지나면서 가난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라는 사실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나는 옛 사람의 습성을 따라 번번이 유혹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사람의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동기를 헤아려주시는 것이다. 넘어질지라도 그 중심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인정해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심을 보아주신다고 해도 인간이 행한 행위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행위가 열매로 드러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런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변개하고 넘어지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신다. 그 첫 번째 장면이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기사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계약이란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계약은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내용을 보라.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는데 아브람이 치르는 대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냥 공짜로 주신다는 의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계약이 아니라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그 땅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입장에서 내놓아야 하는 대가, 혹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것은 아브람에게 주어진 축복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람이 땅을 소유하게 되지만 그에게는 이미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것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간과한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끊임없이 복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이라는 복을 누리거나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여기서 말하는 “뭇 민족의 빛”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자 약속인 “복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받은 복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뭇 민족들을 오히려 멸시하는 선민의식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미칠 수 있도록 뭇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그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새 이스라엘이 생긴 것이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정체성을 잃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도 분명하게 보고 있다. 작금의 가자지구의 사태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온 천하에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을 자신들이 받은 땅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과 본분을 완전히 망각하고 땅을 소유하기 위해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마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모두 ‘가인의 성’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들의 교회를 보호하려고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받았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바로 그것, “복의 근원”과 “ 뭇 민족의 빛”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편에 서고,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은 물론 10·29(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의 편에 서야 하고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섬기는 대열에 앞장을 서야 한다. 그것이 종말의 나라를 받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치러야 하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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