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용서의 공동체
기도와 용서의 공동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1.14 15: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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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가 쓰는 글을 보고 내가 올곧은 사람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한다.

나는 오래도록 글을 써왔다. 내가 쓰는 글은 옳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올곧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올곧은 사람이 아니다. 올곧게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이 몇 사람도 아니고 일부도 아니고 거의 모두가 나를 떠나거나 나와의 관계를 끊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던 것은 내가 올곧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나를 떠나거나 버리는 이유는 내가 올곧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변명을 듣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얼마나 무정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는지도 알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이 올곧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간수하고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자신의 앎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거의 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올곧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혹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올곧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올곧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올곧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없거나 부족하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올곧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올곧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쓰는 글처럼 내가 올곧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서로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는 동료 인간(공동체)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인간에게 주님이 필요한 이유는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이 올곧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구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올곧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올곧게 살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와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그들 스스로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실행할 수 없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진 기사를 생각해보라.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임금님." 왕이 말을 이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

세 사람을 불 속에 던져 넣었지만 불 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이것이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내가 올곧게 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실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내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부족한 것을 주님께 아뢰는 것을 기도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게 된 것을 내가 살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한다. 내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올곧게 살아낸 내 과거나 나의 올무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만을 계속해서 부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는 반드시 자기 의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위선자가 된다.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이 내게서 본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나를 떠나거나 버리는 사람들은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내게서 위선자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그러면 올곧게 살 수 있겠는가? 나 이외의 다른 올곧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나보다 더 훌륭한 신앙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나은 신앙인은 많다. 하지만 아무리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위선자가 될 가능성마저 없는 사람들은 있을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위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나를 떠나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나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라는 사실이다. 내게서 잘못이나 부족한 점이나 모순을 발견하거나 위선자임을 발견한 사람은 나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용서하고 나에게 나의 잘못된 점을 내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그 모습을 비쳐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죄로 보고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거짓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위의 말씀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위 말씀에 이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용서할 수 있는 형제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그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는 그런 공동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를 매개로 해야 하는 관계 자체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온통 싸움과 송사가 난무하는 곳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한 번 틀어짐은 영원한 결별의 빌미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복음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의 생각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이 신앙의 출발점이다.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이나 베드로의 닭 울음소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가 스스로 올곧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혼자서는 신앙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쳐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 자매와 형제들이 필요하다. 물론 끝없는 용서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이루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와 만날 사람들과 나를 떠난 사람들이 나를 용서하고 돌아와 서로를 비쳐주는 기도와 용서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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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2023-11-23 09:36:47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