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 의 기원은 인민사원의 짐존스?
‘순복음’ 의 기원은 인민사원의 짐존스?
  • 김기대
  • 승인 2023.11.1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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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활동가는 어쩌다가 사이비 교주가 되었나

#인민사원 참극 20개월 전에 짐존스는 마르틴 루터 주니어 인권상 수상자였다.

1978 11 18 남미 가이아나 요릭 타운의 ‘그리스도 사도의 인민사원'(Peoples Temple of the Disciples of Christ, 이하 인민사원)’에서 무려 918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주로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었지만 행위가 자발적이었는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참극이 있기 20여개월 전인 1977 1 짐존스는 인권활동가들에게 주는 마르틴 루터 주니어 인권상 여러 수상자 명이었다.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로 요주의 인물이었던 짐존스는 대량 ‘학살’의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1975 가이아나로 이주했으니 상을 받던 77년까지 그는 건실한 사회운동가였을까?

1931년생의 짐존스는어린 시절부터 슬럼가를 중심으로 열정적인 전도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열정 덕분에 특별한 신학 교육없이 인디애나폴리스의 감리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지만 백인과 흑인 구분 없는 통합 예배를 주장하다가 쫓겨났다. 결국 1955년에 자신의 교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목회 활동에 나섰다.

과정에서 존스는 오순절 계열의 성령운동과 치유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던 브랜험의 늦은비 운동(Latter Rain) 받아들이고 순복음(Full Gospel)이란 용어를 유행시키는데 일조했다.브랜험과 존스가 회동하면서 늦은비 운동은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순복음’ 운동은 존스가 인민사원을 창설한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존스가 두각을 나타내자 ‘늦은 비’ 운동에 열심이던 인디애도폴리스의 로렐스트릿장막(Laurel Street Tabernacle) 교인들이 대거 인민사원에 합류했다.

오순절의 성령운동이 백인 중심의 인종 차별적 요소를 버리지 않자 존스는 독자 행보에 나선다. 인종 통합과 인종 차별 반대, 사회 정의, 평등, 자유, 빈민 구제 진보적 가치관을 표명하는 존스는 카리스마적 리더십도 갖고 있어 많은 추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진보적 개신교단인 '그리스도의 제자회' 존스를 회원으로 삼았다.

1960년대 들어 사회주의적 성령운동(David Chidester 사도적 사회주의Apostolic Socialism이라고 부른다) 히피, 반전운동과 맞물리면서 ‘인민사원’의 개성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를 새로운 지도자로 치켜세우던 기성교회 지도자들과 마찰도 당연히 심해질 밖에 없었다. 1964 목사 안수를 받은 존스는 무대를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나무 위키는 존스의 당시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존스는 여기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초대 교회의 문화를 따라 신도의 소득, 부동산, 보험금 등의 자산을 사원에 바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도록 했다. 집회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찬송가로 부르고 설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까기도 했을 정도로 반기독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으며 특히 마오쩌둥 사상에 심취하여 안티 파시즘 정당인 흑표당(블랙 팬더)[6] 지도자였던 휴이 뉴턴이나 안젤라 데이비스 등과 협력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시기에 마르크스의 저작 ‘고타 강령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을 인민사원에 적용시켰다(David Chidester, Salvation and Suicide). 고타 강령 비판이란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기여한 만큼 받는다" 초기 공산주의에서 걸음 나가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 제시한 문건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의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주의의 매우 중요한 문건인데 이것을 인민사원에 적용시켰다는 것이 David Chidester 주장이다.

1977년 1월 짐존스는 마르틴 루터 주니어 인권상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짐 존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77년 1월 짐 존스는 마르틴 루터 주니어 인권상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짐 존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존스는 영지주의에서 이원론적 신관을 배워 왔다. 인간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신은 Sky God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격신보다 높은 천국(Higher Heaven) 관심을 가졌다. 모나드는 영지주의의 최고 신이며 플레로마(Pleroma) 방출한다. 플레로마란 신의 충만 성령같은 의미다. 존스는 인민사원에서 이러한 영지주의적 사고를 배웠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존스는 1974 남미 가이아나의 토지를 구입해 신도들과 함게 존스타운을 건설했다. 이곳에서도 미국과 기독교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 엮어 비난하는 그의 설교는 그치지 않았다.

남미의 밀림생활에 지쳐가던 일부 인민사원 교인들이 미국의 가족들에게 구출을 희망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레오 라이언 의원(민주당) 조사를 위해 존스타운을 방문했다. 첫날은 신도들이 매우 행복해 보인다고 조사단은 파악했으나 갈수록 탈출을 희망하는 신도들이 늘어나자 이주를 원하는 신도 15명을 데리고 떠나는 과정에서 충돌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국 조사단 일행과 잔여 신도 모두 918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어린이를 포함해 900여명의 신도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점에서 아직도 각종 음모론이 그치지 않고 있다. 만약 협박에 의해 죽음을 택했다면 밀림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속출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지극히 작은 숫자만 보고되었다.

교주에 대한 신뢰, 고립된 생활 등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넷플릭스는 ‘이단 종파 지도자가 되는 (How to be cult leader)’이라는 다큐시리즈를 선보였는데 두번 에피소드가 인민사원이었다. 다큐에서 생존자 많은 사람들이 존스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절의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조사단의 파견만 없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존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영지주의, 정의와 평등, 심지어 오순절 성령신앙까지 받아들여 자신의 신학을 만들었다. 이런 사회 운동가로서의 지나친 자신감이 그의 약점이 되었다. 만약 기성교회가 흑백 평등같은 존스의 신학을 받아들였다면 참극을 피할 있었을까?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이단 종파는 발생하는 법이니 다른 종파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성 교회가 사회적 진보를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존스 처럼 ‘악마’가 되어버린 사회 운동가는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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