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11.28 0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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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내게 문화카드를 주었다. 일 년에 십일만 원을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여러 이용처가 있지만 그것을 찾아 사용하기가 내겐 수월치 않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책을 산다. 연말까지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서점에 책 몇 권을 부탁하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찾으러 갔다. 책 몇 권을 더 사야 해서 서점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다. 간신히 몇 권을 골라 십일만 원을 채웠다.

정말이었다. 기독교 서점에 내가 읽을 책은 없었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책들은 읽을 책들이 나오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책은 서점에서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제처럼 그것을 분명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제 내가 벗어나도 완전히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내가 정말 적그리스도가 되었는가? 분명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는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갑자기 심연과도 같은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이런 길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 내게 대하여 하는 말과 같이 도대체 내가 이런 길을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내 이런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갑자기 내 글에 달렸던 어떤 분의 축복이 머리를 맴돌았다.

“대대손손 가난의 축복을 누리시길!”

생각할수록 이 말은 내게 적절한 축복이다. 하지만 내 자손들이 대대손손 가난의 축복을 누리길 원하는가? 내가 정말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가?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분명히 내 자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을 누리길 원한다. 하나님 이외의 소망이 없는 가난에 이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래도 내게 남아 있는 이 찜찜함이나 두려움은 무엇인가.

서점 방문을 통해 나는 절망에 이르렀다. 그토록 수많은 서적들이 다른 길을 제시하는 상황에서 내가 하는 말을 믿고 힘든 가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새삼 내가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갔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목사가 되었다는 호승심에 내가 정말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 시대에 누가 돈을 외면하고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가? 내 아내와 자녀들도 선뜻 그러지 못하고 있다. 새삼 내가 가고 있는 길의 실현불가능성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내가 정신이 나가서 내 전 재산을 날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재산이 있었으면 나는 아마도 이 시대의 가장 칭송을 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공동체도 어렵지 않게 시도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분당 수내 역에서 신대방삼거리 역까지 왔다.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서 내가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다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극복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든 것은 내가 길을 잃은 것일까?

이런 모든 일들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내가 지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힘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럴 때 내게 밀려드는 것이 있다. 주님의 평안이다. 주님은 이럴 때 내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불어넣어주신다. 마약을 해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마약을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불안과 외로움이 사라지고 나는 평안을 넘어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나는 또 의심한다. 신앙이 단순이 이런 느낌이나 심리상태를 의미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근거 없는 이 평안의 의미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인정하게 된다. 세상이 얼마나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이 내게 버리라고 하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수시로 이런 것들로 사람들을 찌르는 일을 하고 있다. 아니 날마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새삼 내가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성서는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가 이미 있었다. 예레미야의 불평 속에 내 마음이 담겨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참으로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겐 절절하다. 예레미야가 당하던 치욕과 모욕거리라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하지만 나도 예레미야처럼 말해야 한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말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외로워서 내겐 고마운 사람이다. 아마도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예레미야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전인수라고 해도 좋다. 나도 안다. 나는 예레미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대하지 않을수록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역설은 반복적으로 역설을 낳고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느껴지는 시점이 항상 존재한다. 지금이 바로 내게 그런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힘든 길이다. 하지만 힘들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세상 끝날 까지 영광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인정이나 위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속은 것이 아니었다. 설득당한 것도 아니었다. 주님이 그를 선택하셨고, 그 또한 주님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선택이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이 선택의 문제가 이토록 심각하고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도박이 아니다. 내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힘을 내야 한다. 힘을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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