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에 있었던 또 다른 군사 반란
12.12에 있었던 또 다른 군사 반란
  • 김기대
  • 승인 2023.12.1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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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송미령이 왜 나와?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한 중국의 공산당은 장시(江西)성에 소비에트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 국공합작을 결렬시킨 장제스(장개석) 공격으로 1934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이른바대장정 나서 9600Km 걸어 1935 10 옌안(延安) 도착한다. 때는 조선 출신의 공산주의자들도 함께 해서 해방이후 연안파는 북한 정부 수립에 축을 담당한다.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을 토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동안 일본은 1931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중국을 야금야금 먹어가다가 본격적인 군사적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제스는 옌안지역을 향한 6 토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제스에게 일본은 안중에 없었고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향하여 내전 중지와 공동 항일 전선에 나서자고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또한 듣지 않았다.

국민당 내부에서 일종의 반란인 시안(西安)사건이 일어난다. 군벌출신으로 장제스 군대의 동북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장쉐량(장학량)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시안에서 납치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다. 시안의 유명한 온천인 화청지에서 목욕하고 있던 장제스는 뒷산으로 피신했다가 장쉐량의 부하들에게 감금되었다. 1936 12 12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감금된 장제스에게 장쉐량은 8가지 항목에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
  2.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 채택할 .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
  7. 쑨원(손문) 박사가 남긴 뜻을 이행할
  8. 전국 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2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일본과 싸울 있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내전의 위험에서 벗어나 항일 투쟁과정에서 자신들의 세를 쌓아 나갔다. 만약 2 국공합작이 없었다면 국민당, 공산당 모두 위험에 처했을 것이고 결과 일본이 중국을 차지했다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마오저뚱을 이은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주은래) 장쉐량을 가리켜영원히 변할 없는 공신이라고 치켜 세운 것도 때문이다.

1930년대 초 쑨원의 묘를 참배하는 장쉐량(왼쪽)과 장제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30년대 초 쑨원의 묘를 참배하는 장쉐량(왼쪽)과 장제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장쉐량은 누구인가?

그는 군벌시대의 수장 하나인 장쭤린의 아들로 1898 태어났다. 군벌이란 1912 청나라가 망한 지방의 세력들이 사병(私兵)형태로 유지하던 무장 세력이다. 군벌 중에서는 한국 근대사에서도 유명한 위안스카이(원세개) 북양군이 유명하다. 군벌로 힘을 얻은 위안스카이는 1915 12 12 중화제국의 황제를 참칭하다가 비난만 받은 물러난다. 그날도 공교롭게 12 12일이었다.

이후 북양파는 분열하는데 하나가 봉천파다. 봉천파는 다른 군벌들과는 다르게 마적단에서 출발한 군벌이다. 군벌이 득세하자 마적단들도 기승을 부리는데 그중 봉천파는 위안스카이의 눈에 들어 북양군에 편입했다가 위안스카이의 실각 본래의 봉천파로 독립해 나갔다.

넷플리스 9부작 드라마도적- 칼의 소리’(연출 황준혁, 극본 한정훈)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항일세력과 마적단, 군벌의 경계가 모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도적'7회에서 일본군과 봉계 군벌(봉천군벌의 다른 이름)의 갈등 장면이 나온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할 당시 30 후반이었고 나이에 동북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아버지의 군벌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장쭤린은 1928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하는데 일본은 마약 중독과 여성편력이 심한 장쉐량이 봉천파 수장이 되면 다루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딛고 장쉐량은 항일 투쟁과 국공합작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장쉐량이 국공합작을 성공시켰지만 어쨌든 장제스에 대한 항명과 반역이었기 때문에 1936 12 31 군사법정에서 징역 10년에 5년간 공민권을 박탈당한다. 장제스의 사면 요청이 받아들여져 자택 연금형에 처해지는데 형은 1990 6월에 가서야, 대만에 가서야 사면에서 풀려 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1991 사망한다. 장수를 누린 셈이다.

장제스는 왜 자신에게 항명한 장쉐량에게 중형을 선고하지 않고 오히려 사면을 요청했을까? 그의 배포가 컸기 때문일까? 50 이상의 자택 감금형을 보면 그도 아닌 같다. 혹시 세간에 떠돌던 쑹메이링(송미령장제스의 아내)과의 염문설때문에? 동북군 중장 장쉐량과 쑨원(손문) 처제 쑹메이링은 1925 상하이의 칵테일 파티에서 처음 만났으며 뉴욕에 살던 105세의 쏭메이링이 장쉐량의 부고 기사를 보고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쑹메이링과 장제스는 1927 결혼했다. 장쉐량이 장제스로부터 서명을 받아낸 8개 조항에는 '쑨원의 유지를 받들라'는 내용도 있다. 그렇다면 장쉐량의 장제스 납치 감금은 화풀이? 쑨원 언급은 쑹메이링이 대한 어필? 역사는 의외로 작은 질투로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사람의 내밀했던 관계는 당사자들 외에는 누구도 없다.

30대의 젊은 장쉐량은 감히장제스 납치 감금함으로서 중국을 살렸지만 50 넘는 오랜 자택 연금 상태에 40 이후의 삶을 보낸 비운의 주인공이다. 뜻을 품은 자가 피해갈 없는 숙명같은 것일까?

영화서울의 ’(감독 김성수) 덕분에 올해 12 12일이 새롭게 다가온다. 1979 그날밤 반란군들이 진압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반란군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휴전선을 지키던 병사들을 빼냈고, 상급자들에게 항명했고, 같은 군인들에게 총질을 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나라도 아니고 오직 사조직하나회뿐이었다. 1936 12 12 마적단의 후예 장쉐량이 보여주었던구국의 결단보다 못한 반란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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