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을 흘리는 각처의 성탄기분, 죄악에 빠져 헤매는 무리들아
시중을 흘리는 각처의 성탄기분, 죄악에 빠져 헤매는 무리들아
  • 김기대
  • 승인 2023.12.19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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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그치지 않은 교회 분쟁- 한국신문 아카이브에서 성탄절을 검색해 보니

내일은 예수 크리스도에 탄일이라 세계 만국에 명절이니 내일 조선 인민들도 마음에 빌기를 조선대군주 폐하께와 왕태자 전하의 성체가 안강 하시고 나라 운수가 영원 하며 조선 전국이 화평 하고 인민들이 무병 하고 부요 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정성으로 빌기를 우리는 바라노라.

1896 12 24 독립신문기사다. 감리교인 서재필이 최초로 기사화 했던 성탄절은 1884년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1899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는 "(크리스마스 ) 근처 여러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구경하여 회당문이 상하도록 들어오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며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가 '상투의 나라'에는 "크리스마스 전날, 왕비(민비) 우리의 성대한 축제와 기원, 의미, 그리고 어떻게 거행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용이 담겼다.

가톨릭 계열의 매일 신보는 1917 조선에서 40회의 성탄을 (맞이)하며, 지난 일과 지금일에 감개가 깊도다라고 쓰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1887년부터 한국에서 성탄절 행사를 치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한국신문 아카이브에 따르면 기사에는 미테르(뮈텔) 주교가 키워드로 나와있다. 미테르 주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지만 친일파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사형직전의 안중근 의사가 요청한 고해성사를 거부한 사실도 있다.

매일신보는 1924 12 24市中을 흘리는 각처의 聖誕氣分, 죄악에 빠져 헤매는 무리들아 맑고 거룩한 종소리를 들으라 기사를 실었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성탄기분(성탄절 분위기) 잔뜩 달아 올랐던 같다. ‘시중을 흘리는 홀리는의 오기인지, 시중에 흘러 넘친다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1935 12 22 매일 신문에는 이런 기사도 실렸다.성탄절, 칠면조 요리는 먹나?’ 한국 교회에 미국 교회의 추수감사절 전통이 자리잡은 것은 해방이후 미군정 때다. 일제 강점기에서 기원도 모르고 추수 감사절 칠면조 요리 전통이 성탄절에 적용된 것을 개탄하는 기사다.

서울 정동교회의 1923년 성탄절 행사- 동아일보
서울 정동교회의 1923년 성탄절 행사- 동아일보

고조되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1937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가라 앉았다. 총독부는 성탄절 행사 대신 일본군에 성탄절 위문품을 보내게 했다. 1940 성탄절은 먼나라의 소식으로만 접할 밖에 없었다.

1940년 12 27 부산일보에는베를린과 파리의 성탄절 ; 설탕과 벌꿀의 특별 배급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시기는 2 대전이 발발하고 파리가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때다. 2 대전 전범국 중의 하나인 일본의 입장에서 독일에게 우호적인 외신은 통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미군정하에서 이미 크리스마스가 휴일이었으나 정부수립후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휴일로 선포한 기사다.

정부에서는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통하야 다음과같이 휴무하기로되였다는바 이는이에 대한 법령을 제정발표할때까지의 임시조치로서 실시하게 것이다’(남조선민보 1948 12 25)

대구시보 1947 12 25 기사에는 이런 것도 있다. ‘성탄절에도 성지휴전은 난망’. 아니 한국전쟁은 1950년에 발발했는데 1947년에 무슨 휴전? 한국 이야기가 아니라성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야기였다. 올해 성탄절에는 땅의 휴전 소식을 들을 있을까?

교회 분쟁은 성탄절, 그것도 한국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다. 마산일보 1951 12 10 자에는 ! 安息日에 醜한 鬪爭!! 新舊敎派派爭은 絶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어로 옮기면괴상한 , 안식일에 추한 투쟁, 신구교파 파쟁은 절정 된다. 신구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싸움이 아니라 마산의 대표적인 교회인 문창교회의 신파 구파의 충돌기사다. 절항(絶項) 절정의 일본식 표현이다. 기사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성한 교리를 잊어버리고 투쟁일로 변한 안식일… 쌍방교인들이 교단에 넘처흐르도록 뛰여오르고 신성한 하나님을 부르짓든 설교단은 때아닌 수라장으로 화하였다. …신파는 경남총회라는 간판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구파는 교인수가 다수를 점하고 동교회에 대한 연고깊은 예배교인들로서 구성되여있어 해결점이 난망시되고있다.

이 기사가 실린 1951년 성탄절에 강원도 양구에서는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했던 싸움은 전쟁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되었고 남북이 휴전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일제에서 투옥되었던 이른바출옥성도'가 주축이 고신파를 1954 장로교총회에서 축출하는 계기가 사건이었다. 반민특위에 부정적인 총회측(신파) 일제하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해온 구파의 갈등이라는 점이 충돌의 핵심 사유인데 마산일보가 심층기사를 싣지 않은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참고로 성탄절과 관계없는 문창교회 이야기를 해보면 1901 설립된 문창교회는 (예장) 총회파와 훗날 고신파로 명명된 파의 싸움으로 유명하다. 법정까지 갔던 싸움 이후 문창교회는 제일 문창교회(고신) 분립했다. 일제 강점기 문창교회의 반일운동은 유명했다. 한국 최초의 목사 7 명인 한석진이 목회했으며 순교자 주기철 목사, 함태영 목사도 교회에서 목회했다. 함태영은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은 아웅산에서 명을 달리한 함병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당한 문창학교의 설립자 이승규 장로, 마산지역 3.1 운동을 지도했고 해방후 여성국회의원으로 유명했던 박순천도 창신교회 출신이다. 시조시인 이은상의 아버지인 이승규 장로는 당회록에 아들 불신 결혼으로 징계를 받은 기록이 있다. 아들이 이은상이었는지 다른 아들이었는지 없으나 아무튼 그때는 그것도 징계사유가 되었던 같다.

올해 성탄절은 싸우던 교회들도 잠시 휴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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