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을 향하는 동방박사를 볼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을 향하는 동방박사를 볼 수 있을까?
  • 김기대
  • 승인 2023.12.23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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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째 동방박사 이야기’로 앞선 박사들을 무색하게 만든 헨리 반 다이크

동방박사 이야기는 설교 아니라 성가, 연극, 성화 성탄절 에피소드 가장 많은 변용이 가능한 이야기다.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동방박사 이야기지만 연극에는 누가복음의 조연들인 목동들과 마굿간의 동물들이 모두 출연한다. 또한 성경에도 없는 동방박사 사람(선물이 가지이지 사람이라는 근거는 없다) 이름까지도 성서무오론자들의 설교에 당연한 사실인듯 언급된다.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자르라고 했던가?

어차피 사람의 정확한 숫자도, 이름도 모르는데 한명 있으면 어떤가? 장로교 목사이자 소설가였던 헨리 다이크는 번째 동방박사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단편네번 동방박사 이야기에서는 번째 동방박사에게 이름을 주지 않더니아르타반에서는 아르타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페르시아 러시아에 내려오는 전설을 반다이크가 소설로 썼다고 한다. 페르시아나 러시아의 교회는 단성론자들의 교회가 아닌가? 같은 양성론을 고백하는 가톨릭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판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성탄절이 되면 단성론자들의 전승에는 한없이 관대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무튼 번째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다이크의 단편이 정경(正經)이다. 구전이나 목회자들의 베껴쓰기 예화보다는 쓰여진 소설이라도 있는 것이 나으니까 말이다. 아래는 반다이크의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요약이다. (출처 :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네번째 동방박사는 가장 젊었고 다른 사람들은 선물 하나씩을 준비했지만 그는 값비싼 개의 보석을 마련했다. 일행과 함께 가던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멈추어 서서 일행과 멀어졌다.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아이를 말에 태워 가까운 마을로 갔다. 마을에서도 아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네번째 박사는 바치려고 했던 보물 하나를 동네 여인에게 주면서 아이를 보살펴 달라고서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다가 장례행렬을 만났다. 젊은 여인과 아이가 구슬피 울며 관을 따라가는 것을 보니 사연이 있어 보였다. 알아보니 남편이 남긴 빚때문에 부인과 아이는 노예로 팔려갈 처지였다. 네번 박사는 보석 하나를 꺼내어 모자에게 주면서 빚을 갚고 땅을 사서 생계를 꾸려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가던 길을 갔다.

그러나 별은 원치 않는 곳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가 마주친 현장은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도 겁이 났지만 외면할 없었다. 결국 살육을 저지르던 군인들에게 나머지 보석을 하나 건네며 살육을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겨우 살육을 멈춘 마을을 떠나 길을 나섰다.

새롭게 태어날 왕에게 드리기로 했던 보석이 하나도 남지 않은 그에게 다시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났다.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노예가 죄로 가장 힘든 선박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가정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 주인의 학대가 너무 힘들어 다른 죄를 지어 주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가족을 폭력의 피해자로 만들어 놓으면 적어도 주인으로부터 남은 가족은 고통은 당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해 고육지책이었다. 보석이 없는 네번 박사는 자기 자신이 그를 대신해 노예선에 탄다. 오랜 세월동안 노예로 모진 고통을 당하던 그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자 다시금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별을 찾아간 그곳에서 일어난 마지막 장면이다.

네번째 동방박사는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만인의 왕이신 주님께 드릴 있는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을 들어 예수님을 향해 뻗었다.

그때 동방박사의 위로 검붉은 피가 뚝뚝뚝 떨어졌다. 방울의 피는 어떤 보석보다도 빛났다. 그때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고 숨을 거뒀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동방박사도 쓰러져 함께 숨을 거뒀다. 손에 예수님의 붉은 피를 움켜쥐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도 숨을 거두었다.

헨리 다이크는 번째 동방박사 자신이 예수에게 가장 선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성서의 동방박사들이야 용무를 마친 되돌아가지 않았는가? 가지 선물이었다는 것도 나름 어떤 의미로 드려졌다고 설교하지만 알레고리 해석일 뿐이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런 의미로 썼다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황금의 경우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데 동방박사 예물을 제외하고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반면 네 번 째 박사의 선물은 그 자체가 어떤 해석없이 효력을 발생시킨다. 

다이크의 짧은 이야기는 성서에 나오는 가지 선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처럼도 읽힌다. 헨리 다이크의 아버지는 같은 이름을 물려줄 정도로 자기 삶에 충실하다고 믿었던 목사였다. 아들 이름 뒤에 주니어(Jr.) 붙을 뿐이었다. 같은 이름의 다이크 시니어(Sr.) 목사는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버지 다이크는 브루클린의 저명한 목사로 남북전쟁 전에는 노예 폐지론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가 소개한 출처는 1897(아버지는 1891 사망했다) 발행된 미국 인명사전이다(National Cyclopedia of American Biography: Volume 7, New York: James T. White and Co., 1897; p. 291).

아들 헨리 다이크는 사전에 실릴 정도로 강렬하게 노예 폐지를 반대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각성했을 것이다. 그의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선물을 받은 마지막 사람이 노예였던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들판에서 상처입은 울고 있던 아이도, 장례행렬을 따르던 모자도 노예가 지도 모를 처지였다.  

그들이 당했던 고통을 보면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상황이 오른다. 가자지구에서 상처입고 우는 아이들, 이스라엘의 폭격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 그들을 가둘 분리 장벽 공사에 임금 노동자로 동원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헨리 다이크의 글에 나오는 선물받은 이들의 모습과 똑같다.

오늘 날 동방박사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가자 지구여야 것이다.

1913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루비두 산에서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는 헨리 반 다이크 목사. 루비두 산의 거대한 십자가는 아직도 있다.
1913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루비두 산에서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는 헨리 반 다이크 목사. 루비두 산의 거대한 십자가는 아직도 있다.

헨리 다이크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세상과 안에는 너무 많은 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세상과 하나님 안에는 너무 많은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저 세상을 좋게 만들려는 그분의 의지를 믿고, 그분이 좋았으면 하는 바람과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개량주의자(Meliorist)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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