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는 더 이상 당신들의 ‘밥’이 아니다
영화계는 더 이상 당신들의 ‘밥’이 아니다
  • 오동진
  • 승인 2024.01.01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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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사회 부조리 고발 신호탄 되어야 할 이선균의 죽음

이선균의 장례가 끝났다. 경기도 광주의 장지에 그는 봉안(奉安)됐다. 그는 영면에 들어갔지만 말이 좋아 영면이지 그의 입이 봉인(封印) 것이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생을 스스로 끝내기 바로 직전의 치욕적인 삶에 비해 언론에서 외면 받았다. 김홍일 신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이선균과 관련됐던 그간의 방송 보도, 특히 KBS 녹취록 공개에 대해 뉴스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자인했지만 얘기는 이제 이로써 이선균의 죽음 자체에 대한 뉴스 가치조차 삭감하라는 지시처럼 느껴졌다. 뉴스는 급격하게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행보로 옮겨 갔다.

영화 '잠'의 한 장면
영화 '잠'의 한 장면

 

그것을 두고 보도국이나 편집국에서는 팩트를 좇는 언론의 생리상 어쩔 없는 일이라고 것이다. 그들이 사실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론이란 사실을 넘어 진실을 추구하거나 추구해야 하는 존재이며 추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배워 왔다. 그러나 우리의 언론은 지금까지, 특히 지난 년은 더욱 , 진실을 좇지 않는다. 허울 좋은 사실만 가지고 두고두고 얘기하려 했다.

 

이선균의 억울함이란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이 있는가

이선균의 마약 투약 혐의를 둘러싼 가지 정황은 사실일 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억울함의 진실 여부에 대해 얘기하는 언론은 없다. 정확하게는 벌떼 같은, 악마에 빙의 , 극히 ‘일베스러운’ 유튜버들에 맞서 그들의 침소봉대 (가짜)뉴스를 고발하고 제어하려 했던 언론들은 없었다. 한국에 에밀 졸라는 없다. 한때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KBS 공영이자 국영 방송이다. 이런 정통 중앙방송이 유튜버들이나 열광하는 녹취록 공개를 버젓이 프라임 타임대에 배치했을까. 진실은 혹시 정치권이 추구하는 일명 ‘쌍특검’에 대한 국민적 시선을 돌리려 했던 의도 아니었을까.

이선균의 죽음이 갖는 진실은 한국사회의 조리돌림 문화이다. 한국에선 이제 건만 잘못 걸리면 인간의 인생은 파탄 난다. 본인뿐만이 아니다. 그의 가족, 삼족의 삼대가 멸해질 정도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다. 어디 숨을 곳이 없다. ‘미치광이 유튜버’들은 끊임없이 가짜 뉴스를 만들고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해당 인사를 사실상의 죽음으로 내몬다. 박수갈채를 받던 연예계 스타 중에 포토라인에 서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경찰에 출두하게 되는 견딜 있는 정신력을 지닌 자는 없다. 확신범이나 정치범은 확신과 신념 때문에 경찰 조사를 19시간을 받든, 휘경동이나 남영동의 대공분실에서 19시간을 거꾸로 매달리든, 어떻게든 살아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19시간 조사를 받으면 정신이 붕괴한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래서 금세,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릴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선균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 언론이라 불리는 극성 유튜버들, 경찰들이 죽였다. 나아가 마약수사를 빌미로 사회 분위기를 호도하려 했던 지금의 검찰 정부가 죽인 셈이다. 그들에게 영화배우, 연예인들은 밥이다. , 돼지이다. 언제든지 치도곤을 내리치고 조리돌림을 내버리면 되는 존재들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 따위, 이들에게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들이 그렇게 억대의 출연료를 받는 아니냐고 비아냥댄다. 그렇게 돈을 버는 대가는 치르며 살아야 하는 아니냐고 낄낄댄다. 그러나 막대한 개런티의 대가는 영화의 완성도와 흥행으로 치르는 것이다. 개인의 자존을 팔라고 하면 된다.

 

동정 분위기 반전시킬 기회 노리는 여론 호도 전문가들

한국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정치적 매춘을 강요하는 사회적 윤락가가 됐다. 정신적 고통을 치료해 주는 사회사상가가 완전히 사라졌다. 종교도 힘을 잃었다. 젊은 세대는 영혼을 끌어 모아 집을 사서 이자 때문에 파산하고, 코인을 해서 돈을 잃고 나서는 앞선 민주화 세대를 기득권층이라 비난한다. 그걸 교정해 주는 공교육은 입시 때문에 바쁘기가 그지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예인, 영화배우의 죽음은 그냥 저자거리의 입방아거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누군가 시기를 노려 동정적인 분위기마저도 한번에 반전시킨다. 그래도 이선균이 마약을 했다는 사실 아냐? 범죄를 저지른 저지른 아냐? 여론 호도 전문가들이 다시 나설 것이다.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는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다시 한동훈의 마약 전쟁으로 계승됐다. 본질은 없고 대민 공포정치용으로만 쓰여진 화법들이다. 이선균은 그것의 희생양이 셈이다.

이선균은 일개 영화배우가 아니다. 경찰과 검찰은 점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선균은 아카데미 4 부문, 특히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쥔 봉준호 연출의 영화 ‘기생충’의 주연급 배우이다. 그의 죽음은 세계적 통신사들인 로이터와 AP 등으로 타전됐다. 영국 가디언지 등등 유력 외신 거의 모두에 속보가 떴다. 오랫동안 미디어 훈련을 받은 외신의 데스크들 대부분은 속보 제목을 ‘유명배우 돌연 사망’ 식으로 뽑았다. 한국의 편집국만이 기사 컷을 ‘마약혐의 이선균’이라고 뽑았다. 방송의 속보 스팟도 대체로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었다. 검사 결과 음성이 나온 데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은 아니냐고… 그래도 언론은 그를 마약 사범으로 몰았다. 그렇게 그를 죽였다.

이선균을 부활시켜야 한다. 근데 그건 이선균이 저질렀던 이런저런 실수와 때론 용납할 없는 관계들, 잘못들을 모두 덮자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실수를 있다. 사람은 살면서 무수한 잘못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는데 그때의 구원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용서받는 자도 구원받고 용서하는 자도 구원받는다. 근데 이때 중요한 것이 참회의 행동이다. 참회라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죄과를 보다 엄중하게 물을 있다.

 

그가 구원받지 못하게 처지에 우리가 구원받을 있나

그런 얘기가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이다. 영화에서 금자(이영애) 참회하지 않는 백선생(최민식) 그가 유괴하고 살해한 희생자의 유가족들과 함께 도륙을 낸다. 구원에 이르는 도중에 참회의 길을 거쳐야 한다는 역설적으로 그런 기회를 줘야 한다는 얘기와 같다. 영화가 오랜 동안, 유구한 역사의 기간 동안 너무나 알고 있고, 그래서 누누이 얘기해 사실이자 주제의식이다. 영화배우인 이선균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참회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세상은 그에게 참회의 기회를 박탈했다. 그가 참회할 없으니 그는 구원받을 없게 됐다. 구원은 쌍방향적인 것이라고 했으니 그가 구원받지 못하게 처지에 우리 역시 구원받을 없게 됐다. 우리 모두도 연옥에 빠지게 것이다.

이선균의 영화는 편이 남아 있다. 김태곤 감독이 만든 재난 블록버스터 ‘탈출’과 추창민 감독이 만든 정치스릴러(로만 알려진) ‘행복의 나라’이다. 편이 개봉돼야 한다. 적어도 그의 유작만큼은 ‘공정’하게 시장에 나와 ‘공정’하게 판단되어져야 한다. 그의 죽음마냥 그의 영화들마저 기회를 놓치게 해서는 된다. 나아가 감독과 제작자, 다른 배우들의 노고는 무슨 죄인가. 그들에게 연대책임을 묻는가. 이건 무슨 연좌제인가.

이선균의 장례 행렬은 비공개로 치러졌다. 전해지는 통곡의 분위기가 넘쳐났다고 했다. 특히 선배 연기자였던 이성민이 그렇게나 오열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가장 어려웠을 때부터 가장 친했던 선후배였다고 했다. 자칫 이성민조차 슬럼프를 겪으면 국내 영화계가 감내해야 부담은 이루 말할 없다. 영화와 예술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된다. 말들은 하지만, 이성민 같은 불굴의 연기자는 속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밥이 아니다!

 

그의 속내가 맞다. 영화배우는, 영화계는, 그리고 국민들은 당신들의 , 돼지가 아니다. 찰스 라이트 밀즈가 『들어라 양키들아』의 제목처럼 누군가 지금의 우리 사회 내부에 진실을 도발적으로 알리고 부조리를 고발해야 한다. 이선균은 죽음으로써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삶의 투쟁이 소용없었다’고 말해서는 아니 일이다. 아서 클라프가 시구이다.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실린 오동진 영화 평론가의 글로  '민들레'와 오동진 평론가의 동의를 얻어 옮겨 싣습니다. (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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