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내 마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1.06 0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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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 글에 달린 댓글에 “스스로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그냥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물론 그것이 지금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누구도 이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에 충실하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

사실 이 말은 무서운 말이다. 개 같이 벌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비굴해져도 좋고, 사기를 쳐도 좋다는 의미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개와 같아진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행위는 세상의 복음과 정 반대의 의미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정승같이 벌어 개같이 사용해야 한다. 정승같이 번다는 의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라는 것이며 개같이 사용한다는 것은 돈을 사용할 때 거들먹거리지 말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숙자 선생님에게 돈을 드릴 때 나를 낮춘다. 그분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분의 존귀함이 살아날 수 있도록 그분을 높여드린다. 그래서 내가 돈을 드려도 되는지 반드시 허락을 받고 돈을 받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그 순간 나는 개(이방인 종)처럼 되어 공손하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드린다. 

나는 이 같은 방식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비능력은 능력이 없어지거나 능력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가장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비능력이라는 말은 내가 자끄 엘륄에게서 배운 복음의 요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완전히 반대다. 그래서 어떤 책 제목은 “도취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무작정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와 방향성을 지닌다. 똑같아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평화의 나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결별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세상 문화와의 결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은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도 세례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 같은 방식이 회개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회개는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무리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도 같았다.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은 먼저 세상의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방식을 답습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방식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심지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교가 울려 퍼지고 있다. “예수 성공이니 불신 실패”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다. 그리고 그런 곳에 한국교회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모습을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는 곳이 되었다. 또 어떤 곳은 평신도의 임무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돈을 벌어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반 복음적 사고를 교리로 명시해놓은 곳도 있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자.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두 벌밖에 없는 속옷을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지 않는 세리들이 있었을까. 협박으로 억지로 빼앗지 않고, 거짓 고소를 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봉급으로 만족하는 군인들이 있었을까? 하나도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쩍 꼬리를 내리고 뒤돌아섰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나 불가능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 벌기를 멈춘 내 눈에는 이제 그것이 불가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이 말하는 ‘윈윈’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첩경임과 동시에 ‘여호와의 불 성곽’이라는 철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의 근원”이 되는 방법이 바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나는 예수님께서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신 이유를 안다. 나는 예수님 코스프레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성서의 일관된 메시지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돈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는 안다. 하지만 거기에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반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도 9회말 투아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의 반전을 기대한다. 이제나 저제나 나는 그런 복음의 반전의 기회를 기다린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은 바로 그런 반전이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나는 맘몬이 하나님인 신자유주의체제 한복판에 이런 반전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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