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사랑
돈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사랑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1.26 0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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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박윤선 목사님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으로 어떤 생각이 옳으냐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님은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일에 경도되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고발을 한 것이다. 그 말인즉 아버지인 박 목사님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지적이었다.

딸의 그런 지적과 그 지적이 담긴 책을 놓고 설왕설래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신앙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가족을 책임지기 위한) 목사의 이중직 문제로 발전했고, 하나님의 일보다 가족을 중시해야 한다는(내 생각에는 개인주의의 일종인) 일종의 흐름을 유발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딸이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아무리 아버지가 잘못을 했더라도 아버지를 그렇게 고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하나님의 일이 가족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모두 어떤 진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현상의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만일 아버지의 사랑이 진실했다면 딸은 아무리 아버지가 일에 경도되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다면 아무리 자신이 힘들었더라도 아버지를 고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버지는 진실로(혹은 온 마음으로) 딸을 사랑하지 않았고, 딸 역시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참된 사랑의 문제이다. 그 사랑은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애정으로 드러난다. 그 사랑은 결코 비현실적이거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보여준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하나님의 일과 사랑하는 서로를 돌보는 애정이 들어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랑을 택했다.

분명 드로아에서 교회의 개척이라는 하나님의 일이 무르익고 있었다. 복음전파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 형제인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아니라는 표현은 얼마나 절묘하고 적확한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바울이 택한 것은 서로를 돌보는 사랑이었다. 사실 사랑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바울은 사랑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박 목사님의 딸의 고발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나는 이런 내용으로 그 사건을 정리하는 글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만큼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사랑에 대해 문외한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는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고, 그것이 문제라는 문제인식을 가진 사람 역시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반대로 나는 돈이 없어야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사실 돈이 모든 것인 신자유주의체제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 없이 하는 사랑을 설명하거나 납득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분들에게 나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내용을 조용기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했을까.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분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헌금해야 한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돈에 경도되어 이 기사에 담긴 사랑의 이야기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맞다. 분명 과부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많이 넣었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계산조차 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분이시다. 예수님이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과부의 마음, 곧 과부의 진실한 사랑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라. 과부가 이 기사에 여럿 등장하는 부자였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전혀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과부는 자기 자신을 드렸다.

파산을 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이후 나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돈으로 하는 사랑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진 이후에 비로소 위 기사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가족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무의미해 보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내 진정한 사랑,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딸들은 알아주었다. 그것을 인정해주고 그들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가난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서로를 주고받는다. 나는 이것이 바로 돈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돈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은 그곳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미움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나는 오랜 가난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사랑의 위대함을 발견했다. 나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과 동시에 소유를 나누는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돈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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