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봉헌 축일과 다람쥐가 무슨 관계?
예수 봉헌 축일과 다람쥐가 무슨 관계?
  • 김기대
  • 승인 2024.02.01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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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호그 데이의 기원

#미국에도 절기(節氣) 있다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는 주로 독일 이민자가 많은 북미주에서 매년 2 2일에 열리는 일종의 절기다. 들다람쥐의 일종인 마멋(그라운드호그)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을 가지고 겨울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짐작한다. 처음에는 독일이민사회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행사가 되었다.

마멋이 굴에서 나와 자기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면 굴을 떠나는데 이것은 겨울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멋이 그림자를 본다면 다시 굴로 들어가 겨울잠을 청한다. 때문에 겨울은 6주가 연장된다.

중세의 성촉절(聖燭節) 행사가 민간 신앙과 결합해 그라운드호그 축제로 발전했다. 성촉절에 날씨가 맑으면(그림자가 보이면) 겨울이 길어진다는 믿음이 중세부터 있었다고 한다.

성촉절은 성탄 40일째 되는 (2 2) 현재 가톨릭에서는 예수 봉헌 축일로 불린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른 것을 기념하는 날로 처음에는 성모 취결례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이날은 거룩한 촛불을 점화했기에 성촉절로 불렸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그의 ‘임종(臨終)'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종 죄를 들으신 신부(神父)

거룩한 산파처럼 나의 영혼을 갈르시라.

성모취결례 미사때 쓰고남은 황촉불!

담머리에 숙인 해바라기꽃과 함께

다른 세상의 태양을 사모하며 돌으라.

영원한 나그네길 노라로 오시는

성자 예수의 쓰신 원광!

나의 영혼에 칠색(七色) 무지개를 심으시라.

나의 평생이오 나종인 괴롬!

사랑의 백금(白金)도가니에 불이 되라.

달고 달으신 성모의 일홈 불으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하라

 

정지용이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한 성촉절은 미국식 자본주의와 결합해 축제가 되었다. 독일 정착민들이 전통을 처음 미국으로 가져왔고 독일에서는 본래는 고슴도치였으나 고슴도치가 드문 펜실베니아에 정착했기 때문에 그라운드호그로 바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1887 2 2 펜실베이니아주 펀수토니( Punxsutawney ) 있는 고블러즈 노브(Gobbler's Knob)에서 처음 시작된 기록이 있다. 요즘도 펀수토니 ( Punxsutawney Phil)이라 불리는 마멋이 축제에 등장한다.

봄을 알린다는 점에서 한국의 절기인 경칩(驚蟄) 같다. 경칩은 개구리가 깨어나서 봄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라운드호그 데이와 닮아 있다. 본래 절기는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청나라때 아담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태양력과 조화롭게 다지 제정했다. 음력을 기반으로 절기가 현재는 양력으로 지켜져 다소 차이가 있는 것도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 월령가’에  24절기가 정리되어 있다.

농경사회 단계를 벗어난 한국에서는 절기가 잊혀져 가지만 서구 사회에는 이러한 축제의 형태로 남아 있다. 한국사회에서 절기를 들을 있는 것은 기상캐스터들의 언급을 통해서이다. 그들의 방송 대본에서 각종 절기는 언급된다.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갔다가 얼어 죽는다”등등. 절기는 본래 농경 사회에서 기후를 짐작할 있는 좋은 지표 였다. .

미국도 기상 캐스터들이 절기를 언급하는지 영화 ‘그라운드 호그 데이’(감독 해럴드 레이미스, 1993) 에서는 기상 캐스터 주인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기상 캐스터 코너는 매사에 투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이름도 축제에 등장하는 그라운드호그의 이름이다. 그는 그라운드호그데이 취재차 펑서토니로 취재를 떠난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성의한 태도로 방송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폭설로 길이 막혀 하루를 묵게 된다.

그런데 펑서토니에서 눈을 다음 놀랍게도 어제(2 2) 똑같은 라디오어제와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영화는 마멋이 다람쥐의 일종이기 때문에 다람지 쳇바퀴처럼 일상이 반복되는 삶을 모티브로 삼았다.

필 코너는 매일 반복되는 삶을 받아 들일 없지만 그것을 이용한다. 어제(오늘?) 오후에 일어난 일을 오전에는 그만 알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장난을 이어 나간다. 마을 레스토랑에서 만난 여자와 만남을 반복해서 정보를 캐낸 다음 고등학교 동창인 속이고 원나잇 스탠드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난폭운전으로 유치장에 가도 다음 일어나면 같은 호텔 같은 시간이다. 생활도 지쳐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여전히 같은 아침에 눈을 뜬다.

지루한 일상에서 그는 성실함과 선행 배워나가고 방송 스탭 리타와 사랑에 빠진다. 리타와 진정한 사랑에 빠진 다음 눈을 떠보니 마침내 2 3일이 되어 있었다.

절기는 농경사회에서 매년 무한 반복되는 지루한 삶의 지표다.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나름 절기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지루함을 극복했다. 경칩에도 은행나무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듯이 말이다.

농경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도 일상이 지루할 때가 있다.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할까? 선행과 사랑이 지루함을 벗어나는 비결이라고 영화는 우리에게 전한다. 그렇게 살아야만 정지용의 ‘임종’처럼 죽음마저도 반복의 완결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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