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바다로 내 몬 기네스 창업주 손자
유대인을 바다로 내 몬 기네스 창업주 손자
  • 김기대
  • 승인 2024.02.13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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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톺아보기) 자국을 위해 싸운 병사를 외면한 튀르키예의 불편한 역사

나치가 동유럽을 점령하자 동유럽의 국가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루마니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 준다는 광고가 마침 지역 신문에 실렸다. 배의 이름은 스트루마(Struma), 스트루마는 동유럽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기도 했다.

최고급 여객선으로 팔레스타인으로모신다는 배는 화려했다. 문제는 1000달러라는 높은 비용이었다. 당시 화폐 기준으로 1000달러면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일 것이다. 일부 유대인들은 아내와 아이들만 승선시키든지, 다른 유대인 가정에 아이들만 맡기는 형태로 이산 가족이 되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은 769명이었다.

매해 폭침일이 되면 유가족 후손들이 항구에 모여 추모행사를 한다. AP 화면 갈무리
매해 폭침일이 되면 유가족 후손들이 항구에 모여 추모행사를 한다. AP 화면 갈무리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배는 여객선이 아니라 주로 가축을 실어나르는 배였고 최대 승선인원도 250 밖에 되지 않았다. 배의 이름을 강이름에서 따온 것을 보면 바다 항해 보다는 강에 최적화된 배였는지도 모른다. 흑해를 거쳐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을 향하던 스트루마호는 이스탄불 해협에서 잦은 기관 고장으로 엔진이 멈춘 표류하다가 결국 1941 12 16 이스탄불로 예인되었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작가 쥴피 리바넬리는 그의 소설세레나데’(오진혁 옮김, 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렇게 쓴다.

배가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는 이상 배가 아니라 떠다니는 관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루마니아는 배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골치 아픈 유대인이 알아서 떠났으면 고마운 일이었다. 튀르키예는 비자문제를 이유로 하선을 거부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영국 정부가 이들의 팔레스타인 비자를 보증해준다면 배를 수리할 동안 승객들의 하선을 허용하겠다고 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영국 수상처칠은 이들을 계속 항해시킬 없다는 원칙만 고수했다. 간단한 수리만 한채 배는 다시 바다로 보내졌다. 이듬해 2 24 힘겹게 항해하던 배가 소련 잠수함 SC213 어뢰 공격으로 폭침했다. 명의 19 청년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었다. 민간인 선박을 향한 어뢰 공격이라는 이유로 소련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2 대전 조사에 따르면 소련은 여러 차례 무선신호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고 했다. 무선 장치가 고장났을 수도 있다. 아무튼 소련에게만 책임을 물을 없다. 이들을 죽음의 바다로 보낸 영국과 튀르키예의 죄가 크다.

이 정도 사건이면 인터넷에 자료가 흘러 넘칠텐데 의외로 자료가 빈약하다. 영문으로 검색해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 사건이 조금이라도 거론되는 것은 쥴퓌 리바넬리의세레나데덕이다. 쥴퓌는 유대인 아내와 이별할 밖에 없었던 가상의 주인공을 내세워 사건을 파헤친다. 스트루마호에 승선한 아내를 구하려다 실패한 튀르키예 남자는 나이 80 넘도록 오랜 타국살이 끝에 돌아와 배가 떠났던 항구를 바라보며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다. 젊은 시절 연애할 작곡한 바이얼린 세레나데를 연주하며 아내를 추억하기에 소설 제목이세레나데.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창작된 인물이지만 사건은 있는 그대로다. 오히려 현존하는 자료 작가가 찾아내 소설에 담긴 내용들이 가장 충실하다. 쥴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투루마호는1867 영국의 뉴캐슬 조선소에서 만든 파나마 국적의 선박으로 그리스의 콤파니아 메디테라네아 데바포레스 리미라타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다(선박은 나라의 회사들 소속이지만 국적은 파나마에 두는 경우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는 유대인 바루흐 콘피노라는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다.

영국의 중동지역 최고 관리이자 스트루마호 승객들이 하선하지 못하도록 튀르키예 정부에 압력을 행사한 월터 에드워드 기네스 모인은 1944 11 6 암살당했다. 그는 유명맥주인 기네스의 창립자 기네스의 증손자이며 윈스턴 처칠의 친구였다. 암살 이유는 스트루마호였다.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테러 단체인 ‘스턴 갱’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스턴 갱’은 지하 테러조직인 ‘로하메이 헤루트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 소속이었다. 17살과 22살의 청년은 1945 3 22 카이로에서 사형당하면서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스트루마호에 대한 복수를 했다

당시 월터는 “이 배에 승객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정부의 주민들”이라며 난민으로 위장한 나치 요원일 있다는 식으로 대처했다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호사가들이 말하는기네스가의 저주리스트에 사건도 포함된다.

좌파 성향의 튀르키예 작가인 쥴피 리바넬리는세레나데에서푸른 연대라는 튀르키예의 다른 수치의 역사를 통해 자기 모국이 저지른 일을 고발한다.

2차대전 당시 튀르키예 정부는 중립 상태였지만 1 대전 당시 오스만 트루크와 독일의 관계 때문인지 독일 편을 들면서 크림반도의 튀르키예계 민병대 ‘푸른 연대’가 러시아와 싸우도록 비밀리에 지원했다. 그러나 2 대전 패전 소련이 ‘푸른 연대’를 반역죄로 처벌하고자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튀르키예 정부는 그들을 러시아에 넘겼고 러시아 영토로 들어오자 마자 그자리에서 모두 처형했다. 튀르기예가 자신들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죽음에 이르게 사건이다. 사건도 인터넷에서 거의 찾기 힘들다.

쥴퓌 리바넬리는스트루마호푸른 연대 통해 자기 모국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홍수 정작 마실 물이 없다 했든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감추고 싶은 뉴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일 있는 뉴스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뉴스가 못해 일을 문학이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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