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딸 송미령 세 자매의 엇갈린 삶
목사 딸 송미령 세 자매의 엇갈린 삶
  • 김기대
  • 승인 2024.02.2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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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자녀 열전) 현대 중국의 중심에 섰던 세 여성, 그들은 목사의 딸이었다.

현대 중국의 여걸, 그들은 목사 송가수의 딸이었다. 본래 한씨 성이었던 송가수(한국어 표기로 기록, 이하 동일) 지독한 가난으로 외가 송씨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집도 넉넉치 못해 멀리 미국에 있던 양부모의 친척에게 가서 일손을 보태기로 한다. 거기서 송씨가 송가수는 감리교인으로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밴더빌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사업에 전념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동시에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자주 부딪히면서 민족의식을 쌓아나갔다. 일찌기 미국 교육을 경험한 그는 6남매(3 3) 두었는데 모두에게 서구식 교육을 시켰다.

본래 집안인 한씨 집안에서도 여자 아이들에 대한 전족(纏足) 반대했던 터라 송가수는 자신의 딸에 대해 전족을 시킨건 물론 이거니와 공부에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아들 셋에 비해 셋이 모두 중국 현대사에 무시할 없는 족적을 남겼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이 그들이다.

자매의 특징은 다음의 글에서 나타난다.

송미령이 모임에 모인 주석들에게여러분들은 외국의 친구들을 접대하는데 필요한 , 예를 들면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송경령이오늘날 중국 여성과 중국 인민의 문제는 나이프와 포오크를 들고 식사할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자 송미령이 난처해하고 잇는 모습을 송애령이 구원을 나서서 오늘날 우리 여성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단결입니다!라고 말해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했다고 한다.

글은 이양자가쓴송경령과 송미령’(새문화 출판사)에서 왔으나 저자도 출처를 밝히지 않아 자매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에피소드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자매의 품성을 보여주는데 보다 좋은창작 없을 것이다.

송미령은 친서방적인 성격이 강했고 삶의 마지막도 10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미국에서 맞았다. 하지만 여걸로서 그를 보여주는데 친서방적 경향은 흠결사항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공합작을 반대하던 남편 장개석이 군벌출신의 장학량에게 납치 구금된 서안 사태에서 송미령은 직접 뛰어들어 남편을 구해냄과 동시에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장학량과 송미령은 해전 스캔들이 정도의 관계였기에 일이 쉬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공합작을 이루어 일로 송미령은 세계적 인물로 부상했으며 1937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여성으로 뽑혔다.

왼쪽부터 애령, 경령, 미령
왼쪽부터 애령, 경령, 미령

 

그는 한국의 임시정부를 후원했으며 일로 한국의 건국훈장까지 받았으니 한국에서는 자매 가장 인지도가 높다. 그가 장개석과 결혼할 장개석에게는 본처와 첩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송미령은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다른 처들과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어서 결국 장개석의 아내가 된다. 대만의 총통을 지낸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장개석의 전처 모복매 소생이다.

세자매 가운데인 송경령은 송미령과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손문의 아내이자 참모로서 그는 손문이 1925 별세하자 32살의 나이로 반장(반장개석)항일운동에 앞장선다. 소련에서 모델을 찾고자 했던 송경령에게 우익 성향이 강한 장개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가 소련에 있을 동생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하게 반대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스탈린은 장개석과의 친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송경령에게 중국으로 귀국하여 장제스에게 협조하라는 강압적인 요구를 했다. 하지만 무시하고 1928 베를린으로 망명지를 옮겼다가 1931 중국으로 영구 귀국을 했다.

귀국 이후 송경령은 중국민권보장동맹 등에서 활동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비판했고 고문, 연좌제, 사형 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2 대전 종전 이후 장개석 정부는 그에게 고위직을 제안했으나 거부하고 공산당으로 전향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초기 명예주석을 맡았다.

모택동의 특사로 외교적 기여를 많이 송경령은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다간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1981 별세에 임박했을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송미령이 보고 싶다고 연락했으나 미국에 거주하던 송미령은 중국 공산당의 초청을 거절했고 송경령의 사후에 대만은 북경에서 날아온 송경령의 사망 전보 수신을 거부했다. 송경령에 대한 대만의 적대감을 짐작할 있는 대목이다.

제일 맏이인 송애령은 중국의 재벌 공상희와 결혼했다. 그녀 역시 외국으로 다니면서 많은 권력자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중에 이탈리의 독재다 뭇솔르니가 있었던 것이 흠이기는 했다.

이처럼 자매는 모두 스탈린 모택동 장개석 뭇솔르니와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예는 앞으로도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넓은 세상에 눈을 떴던 송가수, 축적한 부를 축재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손문의 후원활동과 교육에 썼던 송가수 이러한 그의 세계관이 공과와 사후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딸들을 당대 최고의 여성으로 키워냈다.

송가수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일 수도 있고 손문의 삼민주의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레닌 주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찌감치 전족을 거부했던 집안의 내력이 딸들이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고 있다. 그릇된 전통을 거부하던 작지만 결단이 현대 중국의 굵직굵직한 사건의 현장마다 역할을 충분히 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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