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가 다음 세대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기를
이민교회가 다음 세대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기를
  • 최소연
  • 승인 2024.02.25 0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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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보다 나이가 좀더 있으신 지인으로부터 그분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었는데, 이민와서 교회를 한번도 안나가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위급하셔서 병원에 계신동안, 연락할 별다른 사람이 많지 않아 지인분에게 연락이 왔고, 지인은 친구에게 각종 죽과 음식을 만들어 병원으로 갖다주었다. 장례에 올만한 지인들이 많지 않아 가족장으로 작게 장례식을 치렀다고.

아마도 오랜 이민생활을 하셨을 그분은 세월간 어떤 이들과 마음을 나누셨을까. 비지니스를 하면 네트워크가 필요해서, 그렇지 않더라도 타지 생활이 외로워서, 학부모라면 아이들 학교 정보가 필요해서, 아이들이 자라면 아이들 활동과 네트워크가 필요해서라도 교회에 가지 않기가 힘든것이 이민생활인데. 압박을 반사시키고도 남을 ‘교회가지 않을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를 만큼 이민사회 중심에는 이민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새삼스러웠다.

올해로 이민연차는 채운 30년이 된다. 그중 23년간 삶은 이민교회 바운더리 안에 있었다. 나름 뜨겁게 (이민)교회를 사랑했고, 꽤나 소란스럽게 이별했다. 하지만 신앙을 송두리째 버린 것도 아닌데다가, 그간 알아온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 심지어는 목회자나 선교사 가정도 많아진 탓에 기독교의 그늘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교회, 나에게는 ‘이민교회’는 여전히 멀지 않은 주제이자 소재이다.

교회를 떠난 이후 아이들이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큰아이는 대학에 나이가 되다보니 나이즈음의 아이들이 겪는 ‘이민교회’ 이야기도 가끔 접한다. 고등학교때 하는 다양한 활동을 교회에서 하는 봉사, 단기선교, Sunday school/teaching 통해 하기도 하고, 아예 교회 내에서 ‘봉사단체’를 공식적으로 만들어서 ‘공신력 있는 상’을 줌으로서 아이들의 스펙을 만들어 주려고도 한다. 교회에서 직접 하지 않더라도 이민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봉사단체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안의 네트워크는 로컬 교회 위주인 경우도 있는듯 하다. 방학때마다 교회 고등부에서 수련회를 가고, 주말 저녁에는 교회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한인 2 아이들이 여전히 생각보다 많은것 같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한국 친구들을 만나고 싶으면 또한 주로 기독교 모임인것 같다. 대학이 얼마나 리버럴한지, 아카데믹하고 훌륭한지를 떠나서, 이렇게 이민교회 안에서 자라난 아이들 대부분은 좌측으로 치우친 대학에 저항하듯, 그렇게 해야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 같은 것을 지키려는 , 열심히 몸부림치고 나름의 어떤 세계관 같은 것을 이어나가는듯 하다. 그래서 정한 교회가 없으면 그런 한인 (기독교) 모임에 조인할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고.

아이들을 우리 품안에 두면서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도, 이런 사례들이 궁금하지조차 않았는데,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낼 때가 되니 다른 시각에서 이민교회를 보게 된다. 물론 ‘교회’마다 수많은 스펙트럼과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겠으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한쪽으로 심각하게 치우쳐져 있는 오래된 현실속에서, 나의 아이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아이들에게 어떤 삶의 궤적으로 이어질까.

사진은 하와이에 최로로 세워진 한인이민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출처 교회 누리집
사진은 하와이에 최로로 세워진 한인이민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출처 교회 누리집

한국은 교회가 아니더라도 동류라 여겨질만한 다양한 그룹에 편안하게 조인할수 있지만, 타국에서 이민교회가 제공하는 네트워크라는 것은 일반적인 ‘교회’가 줄수 있는 이상이 있다. 생김새가 같고, 뿌리가 같고, 같은 음식을 즐기며 같은 언어에 기반한 문화가 피부에 이미 스며들어있는 그런 종류의 동류들이 있는 곳이다. 이런 특정한 동질성을 찾아 한국 커뮤니티에 좀더 발을 깊숙이 들여놓고 싶어질때, 아이들은 어떤 네트워크로 접근을 할수 있을까. 나와 남편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특정한) 기독교인들과의 네트워크가 있어왔지만, 학교친구이자 동네친구들이 전부인 아이들은 어떻게 인종적 유대를 넓혀갈수 있을까.

세상을 심각하게 편향된 시각으로 보며 절대적 진리의 수호자라는 세계관 안에서 이민교회는 다음 세대를 제법 키워낸것아닌가싶다. 이민사회라는 특수성 안에서 서로에 대한 예의를 잃고 소수자로서의 열패감에 잠식당하거나 자신를 지키지 못한 이들의 지리멸렬함이 숨김없이 남김없이 전시되고 드러나는, 집단으로서의 이민교회에게 자정의 능력을 기대하지는않는다. 물론 내가 아는, 만나본 분들 중에서는 안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그런 마음으로 신앙도 지키고 남도 지키려 애쓰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집단’으로서의 이민교회는 ‘교회’와 ‘이민’의 고통스러운 교집합으로서의 존재감이 절대적이다. 풍요롭고 모이고 도시적인 곳일수록 더욱 그러한것 같다. 그저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역량과 그런 개인들의 또다른 연대의 힘을 믿어보는 수밖에.

최소연 /뉴스M 독자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통의 방식도, 만남의 고리도 좀더 다양해지겠지다. 다인종 교회(Multi ethnic church라고 쓰고 아시안 교회라고 읽는)라던가, 미미하게나마 넓혀지는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인들 모임이라던가, 다른 문화적 혹은취미의 공통점을 찾은 다양한 네트워크가 풀뿌리처럼 생겨나 크고 작은 모양으로 자리를 잡아가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젊은 세대에게 유의미하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이민교회가 여기서 나고 자란 다음 세대들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기를, 1세대들은 다음 세대들이 마음껏 교회 세상을 두들기고 탐험하고 주먹을 날려도 보고 파도타기 하듯 즐겨볼수 있는 자유를 조금만 허락해 주기를. 이민교회는 별반 달라질 만한 이유도 동력도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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