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2.28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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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이다. 한 수도원에서 가톨릭대학 교수인 신부님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나를 초대했던 신부님이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주셨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설명을 듣고 교수 신부님은 “그러면 교단에서 목사님 월급을 주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개신교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분에게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위험이 없이 가톨릭교회라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기도 했다. 실제로 그것을 참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가톨릭 신자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하지 않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에서 파문을 당하거나 거의 파문을 당하기 직전까지 갔던 사제들의 책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누스의 출현 이전에 이미 가톨릭교회 즉 보편적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조직은 점차로 모든 교회들보다 우월한 힘을 지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교회들을 쉽게 하나뿐인 가톨릭교회의 몸을 자르고 통일성에 앞서 반대하는 이단들로 정죄하게 되었다.”(이단의 출현과 그 과정에서 인용)

가톨릭교회는 대략 서기 200년경에 이미 등장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을 이용했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인간은 선악을 가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이 가리는 선악이 부정확하거나 일시적(시공에 갇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가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선악을 가리는 인간이 자신이 가린 선과 악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리가 사라지고, 인간이 그것을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선악을 분별하려는 존재여야지, 선악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선악을 가리는 존재가 되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대성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폭력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일은 당시의 관습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들이 못마땅했다. 제자들에게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한 말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옳음을 관철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것을 명령하고 싶었다. 사실 이것은 제자들만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모든 문화는 그래서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로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폭력도 용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전쟁은 하나님의 일이다. 힘의 사용은 모든 결과를 선으로 만드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런데 조직이 되어버린 교회가 우월함을 이용해 힘을 사용하는 곳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하게 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폭력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된 가톨릭교회를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서의 가르침이 사라진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폭력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교회들을 쉽게 하나뿐인 가톨릭교회의 몸을 자르고 통일성에 앞서 반대하는 이단들로 정죄하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정확하게 떨어진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폭력을 사용하는 곳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콘스탄티누스가 신앙의 자유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최고 사제가 되었다고 해도 그리스도교를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교 자체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곳으로 변하지 않았고, 사랑이 가지는 가변성을 여전히 지닌 곳이었다면 콘스탄티누스가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으로 단지 영향력 있는 주교들을 장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조직이 되고, 힘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자매와 형제들로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파문하는 것에서 지나 폭력으로 추방하거나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하기에 이른 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역사에서 교훈을 발견하지 못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지금이 바로 그 말을 들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을 없는 분으로 만들었고, 폭력적이 되었던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무너져야 했던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서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인간의 폭력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작금의 그리스도교 역시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다. 폭력 없이 이루는 평화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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