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가 아래에 있는 야곱의 사다리
꼭대기가 아래에 있는 야곱의 사다리
  • 김기대
  • 승인 2024.03.02 0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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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의 책과 50편의 영화로 읽는 창세기) 교활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이유

성서에서 야곱은 교활한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에서가 세상과 먼저 만나는 것을 질투해 발꿈치를 잡았고, 사냥에서 돌아온 형에게 팥죽을 대접하면서 장자권을 갈취했으며,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까지 받아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주며 축복한다. 도대체 ?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된 가인은 죽음과 경쟁이 없던 낙원의 이야기를 부모에게 들으며 그곳을 이상향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 알고 있던 낙원과 달리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며 아벨과 경쟁구도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믿어왔던 것이 깨어지자 그는 죽음을 창조한다.

낙원이 사라진 , 노아는 낙원과는 판이한 실낙원(失樂園) 세상을 경험하고 당황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낙원의 모형인 방주를 선물했다. 홍수가 끝난 이상의 징계가 없을 것이라고 무지개를 보여 주었지만 뒤집어 말하면 거대한 파국의 폐기와 동시에 낙원의 모형 조차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상의 낙원을 꿈꾸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쌓다가 좌절한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 보편의 자리가 개별을 대체하자 이제 공간으로서의 낙원뿐 아니라 철학적 낙원도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진리에만 매달리면 되었던 세상에 선택지기 많아졌다는 것은 재앙에 다름아니다. 이제 각자 개별의 자리에서 낙원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숙명도 함께 주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들은 공동체를 구성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웠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적자(嫡子)들은 제단을 계속 쌓아나가며 하늘에 닿고자 했다.

야곱은 달랐다. 그는 낙원이 사라진 땅에서 낙원을 대체할 무엇을 찾아 헤매었다. 어차피 그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낙원의 기억들은 아름답지 못한데 그는 낙원의 가치관과는 다르게 살아가기로 작정한다. 가치관이 바로 기만과 경쟁이다.

이런 술수의 결과는 가족과의 결별이었다. 그는 한데서 잠을 자다가 신비한 경험을 한다. 눈앞에 사다리가 펼쳐지더니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닌가? 사다리는 땅에서 시작하는 여느 사다리와는 달랐다.

작가 이승우는 그의 단편집 ‘사랑이 일’(문학동네) 실린 단편 ‘야곱의 사다리’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하늘에 견고하게 붙어 있는 건축물이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시작한 건축물이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 기초를 놓고 아래에서 위로 차근차근 지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늘에 기초를 두고 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지어내려온 건축물이었다. 이야기 속의 탑은 꼭대기가 위에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탑은 꼭대기가 아래에 있었다.

꼭대기가 아래에 있는 (사다리, 층계 무엇이든 간에)이라! 사다리의 정점이 땅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우는 야곱의 사다리가 지닌 함의를 가장 파악하고 있다.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과 달리 제단을 쌓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다. 신비체험 후에 소박한 돌단을 쌓고 그곳을 하나님의 (벧엘)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올라가야 도달하는 낙원이 아니라 내려오는 낙원, 다시말해 땅을 이제 낙원으로 만들어야 몫은 인간에게 있다. 대상이 야곱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의 이름을 받는다.

야곱은 자신의 조상들과 달리 낙원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낙원을 그리워했다면 천사를 따라 사다리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 것은 야곱이 따라오나 안오나를 시험해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테런스 맬릭(Terrence Malick )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Tree of Life,2011) 제목이 암시하듯이 생명 나무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실된 낙원에 대한 이야기다. 낙원을 향한 동경은 주인공 잭을 비롯한 3형제가 어릴 나무에 오르던 추억들, 비행기, 엘리베이터 등이 ‘상승’의 미장센으로 작동한다. 강직한 아버지, 무기력을 여성성으로 착각한 1950년대 남부 텍사스의 ‘신앙깊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3 형제의 삶은 그러나 결코 낙원스럽지 못했다. 동생의 죽음으로 낙원이 해체되면서 잭은 가족(낙원) 멀어진다. 상승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소환하지만 낙원은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강에 있다는 점을 잭은 깨닫지 못한다.

일찌감치 상승을 통해 낙원을 찾을 없다는 것을 눈치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 왔다. ‘최선’이 야비한 술책으로 이루어져 있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속의 삶은 낙원과 반대되는 가치관으로만 되어 있는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최선이 결국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신세에 이르렀을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 왔다. 야곱의 이런 야비함을 모두 보고 있었던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로 신분세탁시켜 준다. 상승이 아니라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던 생각을 높이 샀던 것이다. 그의 행위는 빼고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을 지혜, 적극성, 축복에 대한 간절함으로 설교하는 것은 사탄의 소리다.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약속을 한다.

나는 ,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세기 28:13-15)

여기서 땅은 구획되지 않은 땅이다. 창세기 13장에서 롯과 아브라함이 마음대로 나누어 구획하던 땅이 아니다. 겨우 사내 하나 잠자려고 누웠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준다는 의미다. 그냥 땅이 아니라(에레츠) (하에레츠)이다. 후대에 그것은 외쿠메네로 치환되었고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결국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있는 땅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낙원과 세속의 가치관이 상극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상생할 있다.

메시아적 개입에 천착하던 발터 벤야민은 산책자로 파리를 돌아다니면서 아케이드를 관찰했다. 온갖 세속의 욕망이 꿈틀대는 , 속된 공간도 얼마든지 메시아적 개입이 일어날 있는 곳이다. 마르크스 주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그는 의식을 규정하는 존재를 계급에서만 찾지 않았다. 역사를 통해 면면히 흘러온, 다시 말해 위로부터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무엇이라도 유토피아의 촉매가 있다고 보았다.

야곱은 문화라고 믿었던 술수와 위로부터 내려온 사다리 사이에서 소명을 받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고 땅에 남았다. 이제 야곱은 그의 욕망과 결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이스라엘’은 야비해지고 난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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