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이 말하는 난민의 의미
로기완이 말하는 난민의 의미
  • 김기대
  • 승인 2024.03.08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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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의 책과 50편의 영화로 읽는 창세기) 머물 자유가 아니라 떠날 자유

2011년 초판이 나온 조해진 작가의로기완을 만났다 창비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2024 김희진 감독에 의해 연출된 넷플릭스 영화 이름은 로기완 소설과 많은 부분 다르다. 소설에서는 다규멘터리 작가 로기완의 일기를 추적하면서 난민 탈북민 청년과 그가 마주친 사람들의 관계를 다룬다. 반면 영화는마리라는 인물을 추가해 사람이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낯선 나라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완성을 두고 영화가 난민 문제보다는 판타지로 흘렀다고 보는 비판들이 많다.

하지만 영화는 장르적 특징 안에서난민의 문제 훨씬 다루고 있다. 영화 로기완(송중기 , 이하 계속 영화의 로기완이다) 어머니와 함께 탈북한 중국에 머물던 공안의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과정에서 로기완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죽고 시신을 병원에 실습용으로 팔아 마련한 돈으로’(소설에서 작가가 로기완을 표기하는 방식) 난민 신청이 비교적 쉬운 벨기에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마리를 만나 여러 시련을 함께 극복하며 마부작침(磨斧作針) 시기를 보내다가 마침내 사랑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북한을 떠나 방황하던 난민이고 마리는 벨기에 이민자인 동시에 가정을 잃은 난민이다. 성장 배경은 확연히 다르지만 로와 마리는어머니의 부재난민이라는 공통분모로 가까워진다. 표명희가어느 난민’ (창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지구별 위에서 인간은 이래저래 난민일 밖에 없”다.

당연히 모두가 난민이지만 이런 은유를 이용하면 난민이 안고 있는 진짜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특히 한국역사에서난민 이야기가 아니다. 고려시절 원나라에 의해, 조선시절 왜와 청에 의해 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현대에 와서 일제침탈에 따른 난민, 자발적 이주이든 징용이나 징병이든 간에, 발생은 정점을 찍었다.

해방 이후에도 난민의 역사는 그치지 않았다. 특히 제주 4.3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이것은 4.3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난민을 발생시킨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1964 도쿄 올림픽을 전후해서 일본에서 일어난 니시구치 아키라에 의해 저질러진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복수는 나의 ’(1979) 보면 영화 초반부터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저기 풀밭에 누가 누워 있는데요?”, “보나마나 조센진 놈이 술먹고 뻗어 있는 거겠지”. 장면을 혐한 정서의 표현으로 있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속담처럼 해방 조차 자기 나라에서 목숨을 보장받지 못했던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 차라리 일본이 낫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1959년부터 시작한 북송선에 의한 재일교포들의 북한 이주도 남쪽에서 일어난 이런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우리나라가 OECD국가 소문난난민쇄국이라는 사실이 씁슬하다.

창세기는 난민의 역사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난민이며 가인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형벌은 면제받은 난민이었다. 노아의 가족만 남기고 모든 사람을보트피플보다 못한 난민이 되어 죽음을 맞았던 비참한 이야기와 말이 통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던 바벨탑의 이야기도 있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창세기의 역사시대) 살기 시작한 아브라함부터 본격적인 난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이지시한 향하여 믿음으로 난민의 여정을 시작했던 아브라함이 도착한 그곳도 척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집트로 가서 사라를 이용해 정착을 시도했다가 그곳에서도 쫓겨났다. (창세기 12) 이런 과정끝에 창세기는 난민이 주체가 되어 이집트에서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400여년 세월이 흘러 혹독한 난민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림언 윌리몬의하나님의 나그네 백성’(김기철 옮김, 복있는 사람) 번역 제목이 뛰어난 책이다. 원제 Resident Aliens: Life in the Christian Colony 낯선 주민: 기독교의 식민지에서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에일리언은 외계인이 익숙하고 식민지는 일제 강점기를 생각나게 만든다. 하지만 번역제목처럼 책이 너무 달달하다. 땅에 살아가면서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락에 맞서라는 이야기인데 자치 잘못이해 하면이불밖은 너무 추워라는 어느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처럼교회 밖은 너무 추워 있다.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에 교회 밖에서 오히려 따뜻함을 경험할 있는 시대다. 이미 미국에서 논스(Nones, 무신론자에서부터 가톨릭적으로 말하면 냉담자에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영성은 추구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개념) 기독교인들이 하지 못하는 사회적 진보개념을 견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중 마리와 로
영화 중 마리와 로

 

기독교인 모두가 나그네같은 은유적 난민 개념에만 갇힌다면 세계적으로 무려 7천만이나 된다는 현대의 진짜 난민 문제를 외면하기 쉽다.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서발턴(가야트리 스피박) 여러 호명으로 난민을 설명하는 철학에 비해 나그네는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술익는 마을의 타는 저녁놀을 지나가는구름에 가듯이 가는 나그네만큼이나 서정적이다. 오히려 캐런 곤잘레스의보시는 하나님 - 이주와 난민, 그리고 환대 이야기’( 박명준 옮김, 바람이불어오는곳) 나오는 "우리가 타인을 환대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을 환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다라는 말이 조금 현대의 난민 문제에 다가가는 표현이다.

이제는 이방인과 환대를 넘어 그들을 사회적 주체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한 때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의 굴욕적 경험 이후에 가나안 지역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정치적 난민, 종교적 난민, 성적 정체성에 따른 난민, 경제적 난민들로 넘쳐나는 시대다. 특히 무슬림 같은 종교적 난민은 온갖 가짜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 한국 여인들을 서너명씩 데라고 사는 범죄자로 취급받는다. 성소수자들은 환대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저출산 대책 위원회 같은 것이 교회에 있는가? 성소수자 반대 운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영화 말미에서 나레이션 형식을 빌어 로기완은 이렇게 말한다. 난민이란머물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떠날 자유를 얻는 이라고. 세상의 모든 편견과 억압에 맞서 때로는 죽음까지 감수하며 떠났던 그들의 삶을 고작 환대 정도로 맞이하는 것은 우리의 지위(한국인, 이성애자, 남성, 기독교인) 유지하려는 술수로 비쳐질 있다. 그들의 세계관에 갇혀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는 호모 포비아, 이슬라모(무슬림) 포비아 각종 포비아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난민 로기완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뭔가에 갇혀있던 이들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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