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가?
  • 박대준
  • 승인 2012.11.12 13: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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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박대준의 비욘드 스크린] ① [피에타]에 비친 구원 이야기

<미주뉴스앤조이>가 선보이는 본격 영화 비평 '비욘드 스크린'(Beyond screen). 박대준 주재기자가 영화 속에 숨은 신앙의 조각들을 나눕니다. '비욘드 스크린'은 비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

▲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 그 안에 숨은 '구원'의 코드를 풀어본다.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김기덕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프랑스의 깐느,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니스 영화제는 1932년 시작된 최초의 국제 영화제이며 '영화는 예술(藝術)'이라고 믿는 이들에겐 마지막 종착점이기도 하다.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김기덕의 영화가 비로소 '예술'임이 공인된 것이다. 18세기 이후, 예술이라는 개념의 최고 가치를 '미'(美)에서 찾기 시작했음을 감안할 때, 이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아름다운 영화'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더불어 비롯된 문화담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가 모호해지긴 했지만, 영화라는 매개로 사회적 현상에 대해 반응한 그의 종교적 해석 시도가 세계 영화인들의 예술적 공감을 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는 이제껏 극단의 평가를 받아왔다. 영화 속 여성의 형상화에 대한 문제제기와 표현의 잔혹함에 대한 논란은 대중의 외면을 가져왔고 '불편한 영화'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피에타>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인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매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하는 기독교 도상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비탄을 뜻한다. 독일 수도원에서 기도를 드리는 데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나무 조각상인 '베스퍼빌트'(Vesperbild)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15세기 말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작품 <바티칸 피에타>를 통해 종교예술의 대표적 도상이 된다.

대표적인 기독교 도상이지만 '피에타'의 성서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성서에는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무릎에 올려놓고 슬퍼했다는 기록은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이 주제는 오로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서 비롯된 상상인 것이다.

▲ 15세기 말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작품 <바티칸 피에타>. 대표적인 기독교 예술 작품이지만 성서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인터넷 갈무리)
영화 <피에타>의 서사를 이끄는 모티브는 '어머니와 아들'이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어머니의 탯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세상에 나왔다. 생태적으로 어머니에게 아들은 피조물, 아들에게 어머니는 창조주이다. 창조주 없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 '강도'(이정진)라는 인물은 어머니, 즉 창조주에 대한 기억이 없다. 때문에 생명에 대해 무감각하다.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어머니라 주장하는 '미선'(조민수)이 찾아온다.

이즈음부터 매 작품마다 보이는 김기덕 감독의 극단적 상황 설정이 다시 등장한다. 창조주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머니는 아들의 살점을 떼어먹어야 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탯줄을 끊음으로 발생하는 '출생'의 순간과 더불어 '빨고', '자고', '싸는' 생명유지의 최소 여건들을 공급받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 영화에선 이 부분에 대해 의도적으로 관객을 납득시킬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복수'(復讐)라는 시한부적 설정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사라진다. 창조주에 대해 아무 자각이 없던 존재가 어머니로 상징되는 창조주와의 만남을 통해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된 후 경험하게 되는 단절. 견딜 수 없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단절되어 살 수 없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며 비로소 '강도'는 창조주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도 먹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 역시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이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돈 때문에 인간이, 가족이 파괴되고 있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며 제작 동기에서 밝힌 것처럼,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파괴된 사회와 그 속의 개인을 누가 구원할 것인가'이다.

어머니는 가짜였다. '시한부 창조주' 어머니(미선)는 '주어진' 원죄로부터 그(강도)를 구원할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강도' 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쇠사슬을 목에 건다. 자신의 죄는 자신의 생명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가?

어머니를 잃은 '강도'가 무덤 속에 평온한 모습으로 누울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자각, 피조물은 창조주에 대해 어떤 의지도 강요할 수 없기에 구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주어지지 않는다. 구원은 '중보자'를 필요로 한다. 대속(代贖)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 아니라 신적 영역이며 지극히 보편적이다.

▲ 어머니는 가짜였다. '시한부 창조주' 어머니(미선)는 '주어진' 원죄로부터 그(강도)를 구원할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강도' 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쇠사슬을 목에 건다. 자신의 죄는 자신의 생명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인터넷 갈무리)
영화 <피에타>가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신학자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서 "모든 인간 자녀들의 가장 오래된 경험은 어머니 품 안에 안겨져 있다는 경험"이며, 이것이 창조주와 세상을 가장 보편적으로 상징한다고 했다. 철학자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에 필요한 것은 "독창성이 풍부한 이념이라기보다 주어진 개념에서 미적 이념을 찾아내어 그 이념에 어떤 표현을 적용함으로써 주관적 심정이 보편적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피에타>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경험인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구원'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신적인 개념을 영화라는 표현을 적용하여 보편적으로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박대준 / <미주뉴스앤조이>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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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2012-11-15 06:31:21
"<피에타>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경험인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구원'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신적인 개념을 영화라는 표현을 적용하여 보편적으로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제가 갖는 의문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서 주관적 구원을 제시하고 있는가?
기자도 기독교의 구원을 주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영화라는 매개체로 '구원'을 보편적으로 제시했다면 기독교의 '구원'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영화가 기독교의 '구원을 잘 제시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한 감독이 생각하는 '주관적,보편적 구원'을 제시했다는 것인가?

이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자체에 대하여는 무어라 평가할 수없습니다.
다만 기자의 영화평 속에 담긴 내용을 볼 때 이런 의문이 들어 몇 자 적어봅니다.

4hour 2012-11-13 13:48:54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김기덕 영화는 이런 식의 신학적/철학적 해석의 틀을 거부합니다. 언어 이전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관찰해서 표현하려는 야수성을 지닌 감독인데 평론가들이 어줍잖은 해석을 종종 붙이죠. 실제로 김기덕 이 분이 인터뷰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황당해요. 위와 같은 해석을 그 분한테 드리대면 못 알아들으실 거에요. 원래 김기덕은 평론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독 중 한 명입니다. 위 처럼 깔끔한 해석이 안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