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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양반 놀이 하지 맙시다<노비에서 양반으로>, 어느 천민의 신분 세탁

요즘은 다르겠지만 내 세대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가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은 자기가 무슨 본에 무슨 파라는 것을 이야기했으며 누구의 몇 대손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집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께 물었다. “왜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어요?” 아버지는 대답했다. “우리 집안은 오래 전부터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족보를 다 불태웠단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 집안은 본래부터 족보가 없는 천민 가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족보가 기독교라는 새로운 신념과 어긋난다고 믿고 태웠다면  바울을 전통이라는 추상적 보편성과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한 알랭 바디우의 바울과 닮아 있어 싫지 않다.

처음부터 족보가 없었던 천민이라고 해도 조상이 지배계급이 아니었다는 말이니 후손의 마음이 편하다. 농어촌이 결합된 조그만 마을이기는 해도 그 마을에서는 꽤 부호 행세를 했던 선대였다. 족보가 필요했으면 충분히 족보 하나 사들여서 족보 세탁을 하기에 어려움 없는 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리 하지 않았다면 뭔가 고집이 있었을게다.

어차피 전국민이 성씨를 갖게 된 때는 일본 강점기이고 그때부터 김이박씨가 전국민의 45% 정도를 차지하는 쏠림현상이 나타났는데 내 조상이 김씨면 어떻고 마당쇠면 어떤가?  또한 남인계 실학자들과 중인들이 주축이었던 가톨릭 초기 교인들과 달리 하층민 중심으로 선교를 한 개신교를 받아들인 1세대 집안이 양반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족보 – 슬픈 역사의 기록

위키피디아는 이렇게 설명한다.

족보는 조선조 계급 사회의 산물로,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성하면서 양반의 혈통 및 동족 관계를 기록한 족보가 다투어 만들어져 양반의 신분 및 족당 관계를 밝혀 주는 자료가 되었다. 종(縱)으로는 혈통 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 관계를 기록하고 있었고, 그러한 족보를 외는 소위 보학(譜學)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필수 지식이 된다.

조선 후기 대구에서의 어느 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1690년에는 9.2%였던 양반계층(조선 초기 양반은 전 국민의 5%정도) 이  1858년에는 70%를 넘는다. 그중에는 합법적인 신분 상승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재력을 바탕으로 한 신분세탁이었다.

고려대학교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년) 은 경상도 단성현(현 경남 산청)에 살던 김흥발이라는 인물의 신분 세탁연구서다.  1717년에 작성된 단성현 호적에 김흥발은 군포를 바치는 의무를 지닌 평민이었다. 반면  김흥발의 아버지 김수봉은 평민의 직역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지만, 조부 어련과 증조부 이동, 외조부 이금금의 직역은 호적에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노비였다. 그런데 3년 뒤인 1720년에 작성된 호적에는 이들의 직역이 모두 기재돼 있다. 재력을 바탕으로 신분 세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권내현 교수는 김수봉의 가계가 약 200년 동안 노비에서 평민으로, 다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낸 과정을 조선 시대 호적대장을 추적해 밝혀 냈다.

1717년 호적에 김흥발의 직역은  ‘납속통정대부’였다.  납속이란 국가에 납부한다는 의미이다. 김수봉은 인구가 141만명이 감소한 을병대기근(1695~1696)을 거친 이후에  많은 곡식을 납부하고 통정대부라는 평민의 품계를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수봉은 성을 ‘김’으로 하고 본관을 ‘김해’로 했다. 수봉의 가문은 19세기 중엽에는 호적에 유학(幼學)으로 기록되었다. 유학은 관직을 갖지 못한 일반 양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양반에게만 부여되는 직역이었다. 노비에서 양반이 되는데 약 200년이 소요되었다. 아마도 죽으면서 족보를 세탁하라는 유언을 하지 않았을까?

한국 신분 상승의 기록을 보면 서구의 민중 혁명의 역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혁파하기 보다는 상부 구조 속으로 편입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의 저술이  천민가의 신분 상승 욕망을 희화화 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출생이 운명을 결정하는 신분제 사회를 벗어나기 위했던 민중들의 처절한 삶의 기록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처럼 사회 구조를 바꾼 것이 아니라 양반 사회를 모방하기에 급급했던 슬픈 기록이기도 하다.  모방과 세탁에 성공한 거짓 양반들은 제사에 더 집착함으로써 거짓을 숨기려고 한다. 한술 더 떠 자칭 진보라는 기독교인들은 제사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제사가 가진 계급 모순과 허위를 외면한다. 그들에게 공부가 더 필요한 이유이다.

교회에서의 양반 놀이 

저자는 이야기 한다.

 오늘날 경제력과 학력은 서서히 특권화되면서 대물림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태어나면서 이미 출발선이 다른 신양반층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선언은 기회의 균등을 의미할 뿐 출생과 동시에 획득된 조건의 불평등을 염두에 둔 말은 아니다. 수봉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좁혀 나간 심정량가(노비 수봉을 소유했던 양반가)와의 간극은 근래 들어 기회의 균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멀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장으로 가는 사다리에서 밀려난 이들은 수봉가처럼 또다시 기회를 엿보며 장기간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수봉가의 후손들은, 심지어 심정량가의 후손들마저 그것이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고 그저 흘러간 역사로 남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201쪽)

교회는 경제력에 기초한 새로운 계급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조차 밀려나 새로운 하층민 계급으로 전락한다. 목사들은 입시철이 되면 학력 상승욕구를 자극하는 기도회를 열어주고, 명문대 입학, 재벌 회사 입사, 유학 이라는 새로운 호적에 기록된 사람들은 ‘구원’ 마저 독점한 계급처럼 교회에서 행세한다.

책은 김수봉가가 어떻게 재력을 쌓아 나갔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는 천민도 부를 쌓을 기회가 있는 사회였던 모양이다. 신분제가 없어진 지금,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과연 경제력으로 신분 상승이라도 할 수 있는 사회이기는 한건가?

   
1912년 동양서원에서 간행된 요한 1서, 2서, 3서 주석 © 길벗 소장 도서

 

양반이 되고 싶어했던 수봉가의 한(恨) 조차 풀수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잘못된 구조를 고쳐나가야 할 목사들은 교회의 제사장이 되어 신분 상승 욕구를 적절히 자극하면서 그들보다 상층의 계급인냥 군림한다.

     
 

천민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를 나의 조부(일찍 돌아가셨으므로 뵌 적은 없다)는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족보를 세탁해서 양반 행세를 하기 보다는 시골마을까지 찾아온 권서인(勸書人)으로부터 구입했을 책으로 공부하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했던 당신의 손자는 아직도 신흥 양반이 되지 못한 채 책을 읽고 있다.

길벗 / <뉴스 M>

길벗  edit@n314.ndsof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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