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아저씨
목사 아저씨
  • 최태선
  • 승인 2014.11.18 10: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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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나를 아저씨라 부르는 그 사람에게

농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밭에 남은 무와 배추 그리고 콩을 수확하면 올해 농사는 끝납니다. 항상 열심히 하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은 이 일을 5년이나 해왔습니다. 친구 목사님의 아내가 암에 걸려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 드리려던 소박한 바람이 농사를 열심히 짓게 만들었습니다. 주변에 의외로 많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농약을 치지 않고 기른 채소들을 건네는 건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올해도 한 분을 만났습니다. 수확한 채소들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분이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팔지는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수확한 것을 그냥 그분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남편이 전립선 암 말기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밭에 나와 무어든 따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움날 그분이 정말 밭에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사 짓는 밭을 알려드리고 그분이 심고 싶어 하는 강황을 심을 수 있도록 밭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은 제가 하는 농사일을 돕기도 하면서 밭의 소출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제가 목사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바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분에게 목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나오시는 분이 밭에 나왔다가 제가 목사라는 걸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분이 저를 목사라고 부를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호칭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아저씨"였습니다. 무언가 속에서 조금씩 솟아 올랐습니다. 그분 역시 교회를 나가고 있는 분입니다. 사위는 기독교 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니 일부러 더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교양이 없는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늘 무시당하며 사는 제 삶이 생각나 제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 같은 목사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짓밟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을 닮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을 이기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전보다 더 잘해드리기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거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과분한 대우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라는 한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넘치는 대접을 받습니다. 회의나 나눔, 모임 때 항상 중앙이나 상석에 앉습니다. 사제가 앉는 자리는 꽃으로 단장하고 그 자리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집니다. 제 부모님의 나이의 어르신들은 소박한 음식으로 만족하는데 사제랍시고 받는 음식은 넘치고 남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함은 사라지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가슴 안에서부터 부끄러움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구석에 앉습니다. 본당에서 나눔을 하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어르신들이 드시는 모습을 살피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주시는 소주 한잔을 받아먹습니다. 빈속에 들어가는 알코올의 짜릿한 자극을 느끼는 순간 드시던 음식을 안주라고 하시며 입에 넣어 주십니다. 좋습니다. 넘치지 않아서 좋습니다. 적음의 풍요를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을 체험합니다.

이 분은 저와 반대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신 신부님에게 가톨릭 신자가 "아저씨'라고 부른다면 이 신부님은 좋아하실까요? 모르겠습니다. 신부님들은 수도를 하시는 분들이니 저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모두가 말은 만인제사장이니 어쩌니 하면서도 실제로는 대접에 너무 익숙해져 그런 무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목사나 사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글 쓰신 신부님 말마따나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부끄러움도 느끼지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사제(목사)라는 의식이 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사니 신부니 하는 호칭은 불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필요할 때(장례나 예식 혹은 급한 기도 부탁 같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늘 대하기에는 어딘가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층 간의 벽을 허문 예수님 앞에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먼저 낮아지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분을 뭔가 아는 사람들, 뭔가 가진 사람들은 먹보라고 부르기도 하고 술주정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저씨"라는 호칭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당신의 사명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 18-19)

 

물론 오늘날 목사님들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부자들에게 더 큰 축복을 내리고 가난한 자에게 적선을 하고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죽은 후에는 천국 소망이 있으니 잘 참고 견디라는 복음을 전파하며 주의 은혜의 해 같은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함을 전파'하는 분들이 되셨기에 생경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지만 혹시라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거나 이성의 한 부분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면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가 있는지 포로된 자가 있는지.... 주의 은혜를 선포해야만 하는 억압 구조가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란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과 달리 사람을 커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게 합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큰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높은 곳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너무 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런 그분을 보면서 자신도 너무 큰 사람이 되었거나 큰 사람인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못마땅해서 그분이 미워지는 저를 보고 제가 아직도 나쁜 목사임을 절감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제 마음과 제 신앙과 제 영적 성숙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만 합니다. 하지만 부끄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변화의 시작은 잘못된 현실을 인식하고 제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위의 글을 쓰신 신부님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이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행동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면서 주인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필요하고, 들어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때 주어진 예언직, 사제직 그리고 왕직을 세상에 구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례 때 하느님의 선물인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탈렌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더 많은 탈렌트를 벌어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신 신부님이 좋아졌습니다. 이런 신부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런 신부님 같은 목사님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내년 농사를 잘 지어야겠습니다. 시커멓게 탄 얼굴로 계속해서 무시를 당하겠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형님 같은 경지에 이르면 감사할 일밖에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오늘도 감사를 드립니다. "찬미 예수님!!"(신부님께도 고맙기에)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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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4-12-13 07:19:11
최태선 목사님, 내가 목사인거 아냐고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접 말안하고 속으로만 이랬을까 저랬을까 상상하고 판단하는데에 아주 익숙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오해도 많이 생기고 아무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누가 날 미워하기도 하고 태도가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고 밝히고 하면 세상에 오해가 훨씬 더 줄어들텐데요.

목사님의 경우도 내가 목사라고 직접 말했는데도 목사라고 안부르면 기분나쁠 수도 있겠지만 목사님이 직접 밝히지 않았다면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일 아닐까요? 둘 사이에 그런 종류의 직접적인 자기소개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호칭을 바꾸는게 더 어색할 수도 있으니까요. 누가 목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는 하지만 그 아주머니께서 여전히 모르실 가능성도 있고요. 어느 정도 안면이 생겼으니 목사님께서 먼저 내가 목사라고 직접 말씀하시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강민호 2014-12-12 16:42:50
요즘 제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는 감사한 글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