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모범적 교회는 없다
완성된 모범적 교회는 없다
  • 최태선
  • 승인 2015.04.27 14:1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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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좋은 교회'라는 말에 담긴 함정

오래도록 좋은 교회를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대개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고, 대형교회였습니다. 실제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감동도 많이 받았고, 배울 점 역시 많았습니다.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많이 배우는 것 같고, 또 은혜를 받은 것같이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했는데 그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반복되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영접 기도로의 초대가 시작되면 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녔고,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막상 초청의 기도를 들으면 늘 초신자처럼 영접하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배를 감상하고 즐기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주님께 저를 내어드리겠다고 날마다 고백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만 찬양과 말씀의 감동이 주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았고, 다만 그 자리에 있었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모험의 삶으로 뛰어들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투박한 사랑 속으로의 투신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보게 된 이후 문제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이라는 단어에 그 뿌리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난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정을 받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인정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교회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정은 늘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점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판단의 기준이 심사숙고와 고민 끝에 내려진, 거기에 더해 기도 가운데 내려진 주님의 마음과 복음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느냐가 관건이 되어야 했는데 그것이 아닌 피상적인 사람들의 인정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매체에 올려지는 기사나 글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큰 교회, 이름난 목사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드물게 칭찬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대형교회 목사들의 파행이 있었고, 한동안 잠잠하다 마침내 그것이 드러나 알려지고, 내분이 생기고, 한동안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밖에서 그러한 일에 대한 지적과 충고가 한동안 이루어지고, 세상 법정의 판단에 따라 어느 한 쪽이 교회를 장악하거나, 갈라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토록 악악거리며 주장하던 것들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유야무야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잘못된 목사를 쫓아낸다고 그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갈라진다고 복음적인 교회가 탄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똑같은 디엔에이를 가진 교회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고, 똑같은 디엔에이를 가진 신자가 똑같은 디엔에이를 가진 교회에 가감될 뿐입니다.

 

감히 말하거니와 그것은 영적인 성숙도 아니고, 더더욱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월감을 가진 나르시즘 영성인 사람들의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습니다. 가장 명확한 이유는 그들 모두가 큰 것에 목을 매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향력과 업적을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의 결정적인 함정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는 방향이 이미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개입이 이루어질 수 없고,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판단을 받는 세속적인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집단들은 필연적으로 전체성(Totality)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된 목표를 가지고, 통일된 가치관을 가지고, 통일된 행동지침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게 되는 일은 끔찍한 편가름과 정죄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편을 가르고, 한동안 설득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통일된 견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지우거나 말살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속성과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지도 못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관건은 언제나 누가 더 큰 힘을 가지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신들은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헌신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샬롬'과는 관계가 없는 인간들의 헤게모니 싸움일 뿐입니다.

 

누가 높으냐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 25-2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한사코 커지고, 한사코 힘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들은 한심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타산지석 삼아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한사코 낮아지려 하고, 작아지려 하고, 섬기려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초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면 누구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는 위선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래서 커지려 하고, 커진 것을 성령의 역사로 위장하고, 가시적인 성과물들을 증거로 내세우며 점점 더 주님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대중의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진 평판과 인정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기 때문에 점점 더 위선적이 되고,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사에서 자기들의 교회에 "신앙생활, 봉사 활동, 선교 활동 등 모든 분야에서 모범을 보여 한국교회에 귀감이 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을 넘어 "귀감"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모습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의 전형적인 행태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권세를 부리고 임의로 주관하려는 자신들의 태도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부심을 느끼는 그만큼 주님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고, 좋은 교회라고 하고, 자기들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수준이 높고,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영원히 온전한 교회로, 완성될 수 없는 미래형으로서의 교회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육신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지만 결코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최선의 노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성령님이 함께 하셔도 우리의 교회는 영원히 온전히 완성된 교회로서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실험의 기회이고 우리의 그런 노력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그런 겸손한 모습을 통해,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고, 그렇게 드러나는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귀감이 될 수 있는 교회는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자기들의 부족함을 깨달아 아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성을 버리고 '우리'라는 벽을 허문 교회입니다. 때로는 무질서해 보이고, 때로는 너무 무력해 보이고, 때로는 너무 미약해서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누구든 용납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마침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아갈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세워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자랑하지 않고, 간혹 세상의 이목이 주목하는 경우가 생겨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가리고,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모든 지체가 공유하고, 이웃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기꺼이 흩어 나눌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청준님의 소설 제목처럼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큰 교회가 되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고가 불식되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터무니 없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자신들의 흥망에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오만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흉악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고전 4:13 참조)되었습니다. 그분들을 본 받고 싶습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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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5-07-23 10:33:59
귀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더 낮아지는 길 걷겠습니다.

말씀 2015-04-29 08:19:12
쟌 맥아더 목사님 말씀처럼 50%복음 50% 자기 말하는 설교자도 엉터리지만 99% 복음 전하고 1% 자기 생각 설교시간에 말하는 자는 더 나쁜 사이비랍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초대교회 때도 오죽하면 베드로사도 같은 경우 그렇게 로마에 의해서 핍박을 받으면서 이단들을 더 경계하라고 했겠습니까?
핍박하는 네로보다 더 무서운 건 예수를 가장하는 교회 안의 사이비입니다.
좋은 교회는 시설 좋은데서 감동에 겨워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결국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제대로 죄를 깨닫고 겸손하게 말씀을 말씀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 들이는가에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