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본고사와 신학대 진학
수학 본고사와 신학대 진학
  • 김거성
  • 승인 2015.08.0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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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1. 지망하던 신학대를 변경하다

고등학교에서 이과 공부를 하던 나는 예비고사도 끝난 막판에 신학대 진학이라는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을 했다. “이제 저는 본고사에 국어, 영어, 국사만 준비하면 됩니다. 수학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이런 내 간청에 교장 선생님은 오히려 “신학대 가면 안 된다”고 말리며 설득이 실패하자 “수학 시간 빠지면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지내고 당시 루터교단에서 선발한 신학생 후보자가 되어 '한국신학대학'(한신대 전신)에서 위탁교육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본고사까지 남은 기간을 어쩔 수 없이 수학을 포함한 모든 과목 수업에 참여해야 했다. 당시 한신대에는 수학 과목이 본고사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루터교단이 1976년부터는 위탁교육기관을 연세대 신학과로 바꾸었고, 그 입학이 최종 확정되면 교단에서 학비를 지원해 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세대 본고사에서는 수학 시험도 치러야 했다. 내 동기의 아버지인, 그렇게도 원망스럽게 느껴졌던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고마운 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벽장에 올라가 매일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나는 목사가 되겠다’고 말했던 까닭에 나는 자유의지로 신학을 선택했고 또 연세대 신학과 합격통보를 받은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시집온 후 애기를 가지지 못하여 ‘아들을 주시면 첫째는 하나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가진 아들이니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섭리가 있구나, 내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 뜻 안에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 감옥에서 찾은 신앙의 의미

1977년 10월 12일 수요일 당시 신과대 건물로 쓰이던 한경관 2층 강당에서 신과대 채플이 막 시작되어 묵도를 드리고 있던 나를 기독학생회(SCA) 동기인 친구 강성구(현 충남교육청 감사관)가 불러내었다. ‘기도 끝나면 나가자’고 대답한 후 함께 대강당 입구에 있던 동아리실로 가니 다른 친구인 노영민(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장, 3선 국회의원)이 등사해 온 ‘구국선언서’를 한 뭉치 내 놓으면서 신과대 예배가 끝나면 뿌려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그렇게 하마”라고 대답했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내 일생을 험난한 파도와 맞싸워야 하는 항로에 맡긴  순간이었다.

신과대 예배가 끝나고 잠시만 남아달라는 부탁에 학우들은 “책 파냐?”고 놀리면서도 자리를 지켜주었다. 나누어 준 구국선언서를 낭독하고 마지막으로 ‘하나, **** 위해 싸운다’는 부분을 읽을 때에는 다 한 목소리로 힘차게 “하나!”를 외쳐 주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오후 멀리 도망갔다가 다음 날 이리시(지금 익산시)에서 붙잡혀 서대문경찰서에 오니 이미 대부분의 조사는 완료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쓰라”는 형사의 요구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내 친척 내 재물 내 명에 내 생명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루터가 지은 찬송가 가사를 적었다. 귀싸대기를 맞았어도 속은 후련했다.

검찰청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라는 실정법을 어긴 것은 맞지 않느냐는 검사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권리와 자연법을 들먹이니 검사는 씩씩거리며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따귀를 갈긴다. 결국 노영민에게는 징역 7년을, 내게는 5년을 구형했고 항소심에서 1년6월을 선고 받아 대법원에서 확정된 후 1979년 5월 안양교도소에서 만기출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1978년 서울구치소에서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친 것 때문에 또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중이어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 영등포교도소로 직행하여 별 두 개째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자 박정희 정권은 정치범들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노영민은 원래의 형기가 끝나지 않아 7월 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나고 나는 재판이 확정된 다음 광복절 특사로 출소할 수 있었다. 2년 가까운 수형생활을 통해 “내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세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 박정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 아니던가?

3.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늘 감옥에서 했던 다짐을 나의 판단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다시 끌려가서 ‘정말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회의를 하게 만든 고문조차도 이를 흔들지 못했다. 수입이 보장된 교사의 길을 마다하고 전도사로서의 삶을 택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고민 대신에 내 소신을 앞세우고자 했다. 목회에서, 사회활동에서 내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자 노력했다.

대신 가족들이 그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다. 부모님은 내가 미결수 신분이었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로 서대문 구치소에 또 안양교도소에 찾아오셨다. 감옥에 갇혀 있는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겨울 내내 연탄불을 때지 않고 냉기를 감수하셨다. 아내는 늘 수입이 변변치 못한 남편 대신 생활 일선에 나서서 가족생계를 책임지고 어려운 길을 걸어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돌이켜보면 완벽하지 못했고, 정말 많은 잘못과 한계가 있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라는 나 자신의 믿음조차도 미완성인 상태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그저 지향일 뿐 결코 내 현실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제야 몰려온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부끄럼 뿐이라 황송하나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니 생명의 면류관 내 것일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경책에 남기신 찬송가 가사가 이제 내 고백이 된다.

김거성 목사 /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구민교회(기장) 담임 목사이며 경기도 교육청 감사관도 겸하고 있다. 한국투명성기구(반부패국민연대)사무총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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