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에게 어딜 감히
'주의 종'에게 어딜 감히
  • 백종국
  • 승인 2007.12.2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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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1. '주의 자녀'가 '주의 종'을 섬겨야 하는 오류

한국의 개신교회는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 사회 내에서 일종의 게토(ghetto)를 형성해왔다. 게토라는 말이 좀 지나쳤다면 일종의 독특한 문화 공동체를 형성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주여 삼창'과 같은 독특한 어법, '주의 종'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는 독특한 권위 체계, '예수 천당' 식으로 타인의 형편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독특한 행동 양식 등으로 확실히 여타의 사회와 구별되고 있다.

기독교가 여타 사회와 구별되는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바이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을 때 이 거룩함은 곧 구별됨을 의미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모인 공동체, 즉 교회도 세상과 구별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이 구별됨의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한국 교회의 구별됨은 세 단계를 거치고 있다.

첫 단계는 전파의 초기 단계이다. 전통적 사상과 봉건적 질서와 심하게 충돌하면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서도 다수가 비록 굴종하였지만 적지 않은 소수가 이 체제와 융합하지 않으므로 역시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 단계에서 구별됨은 사회를 이끄는 향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 단계는 사회적 주류로의 편입 단계이다. 해방이 되면서 기독교는 적은 인구 비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주류로 등장하였다. 군정을 실시한 미국과의 친화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항일투쟁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다는 역사적 정통성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이 단계에서 구별됨은 거의 사라지고 기독교 인구 또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셋째 단계는 퇴폐적 게토화 단계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주류로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에 접촉하면서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다. 정치 권력자들의 다수는 지속적으로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인임을 공공연히 언명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급속히 민주화되고 투명해지는 데 반하여 교회 체제는 더욱 권위주의화하고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도저히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행태들이 사회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한국 교회의 구별됨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수치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개그 ‘목사=주의 종'

교회 생활이 개그 프로그램의 주제로 변한 이유 중 하나가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세 삼창에서 따온 '주여 삼창', 시도 때도 없이-그야말로 강아지 훈련시키듯이 기침만 해도 따라하게 만든 '아멘'과 '할렐루야' 합창 등이 그 주요 사례이다. 그 중 가장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사례가 바로 '주의 종'의 용법이다.

여기에서 '종'이란 은유이다. 한국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는 누구도 남의 종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타인의 '종'이 되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인 중 일부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려는 사람이라는 은유이다.

한국 교회는 놀랍게도 이러한 은유를 제도화하고 목사직의 고유명사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목사=주의 종'이라는 인식을 일반화하고 신학의 일부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화의 오류는 고사하고 수사적 용법에서조차도 우스꽝스러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건전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필자가 참석한 어느 부흥회에서였다. 그 유능한 부흥사는 며칠 동안 그 교회 교우들에게 평화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녀이며 그리스도가 눈동자처럼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자녀는 모든 질병과 가난과 배고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설교 때였다.

그날 설교는 주의 종에 대한 설교였다. 주의 종, 즉 그 교회의 담임목사야말로 그리스도가 친히 부르셨고 기름 부어 세우셨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를 섬기듯이, 여러분은 담임목사를 섬겨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월급에서부터 자동차, 주택, 양복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목사를 섬기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주의 자녀'들이 '주의 종'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도대체 가능한 말인가?

주의 자녀들아, 주의 종을 섬겨라!

상식적인 용법이라면, '주의 종'이 '주의 자녀'를 섬겨야 한다. 그것도 마치 주인을 섬기듯이 그의 종은 그의 자녀를 섬겨야 한다. 만일 자녀가 종의 잘못을 주인에게 일러바치면 그 종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 '종'이 '자녀'보다 우월한 위치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어쨌든 은유라는 점에 유의하자. 이 비유를 잘못 적용하여 목사를 제외한 목사의 가족들을 함께 '종' 취급한다면 이 또한 무식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지칭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아마 한국에서 교회에 자주 출석하는 사람들 치고 필자가 이렇게 말할 때 혼란을 겪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주 오랫동안 대다수의 한국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주의 종'인 자신들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의 자녀'들인 한국의 교인들에게 '(주의 종)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셈이다. 너무나 분명하게 상식과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이지만 너무나도 오랫동안 일치단결하여 가르쳐왔기 때문에 교인들의 상당수가 그렇게 믿고 있다.

누가 '주의 종'일까? 먼저 자신이 '주의 종'이 아니라 '주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간단히 생각해보자. 자신이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가 돌봐주실 것이기 때문에 편안하다. 즐겁다. 떼를 쓸 수도 있다. 아양을 부릴 수도 있다. 마음껏 누릴 수도 있다. 여하튼 아빠가 크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할 자유도 있다. 설사 실수를 좀 했다 해도 곧 용서를 빌면 된다. 자녀에게 냉혹할 부모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라면? 종의 처지는 다르다. 종이 아양을 떤다? 모르지… 그 일을 위해 선택한 종이라면 몰라도. 마치 강아지를 부러워 한 당나귀가 아양을 떤답시고 주인 무릎 위에 오르는 꼴이 될지 모른다.

진실로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이 가르친 바를 상기해야 한다. 자신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종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비유로 가르치신 바가 있다.

2. 누가복음 17장 연구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유태인의 배척이 시작될 즈음에 바로 이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바가 있다. 누가는 그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예리한 필체로 이 비유의 기원과 위치와 의미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바로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10절까지이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걸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누가의 기록은 아마도 시공간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까지를 보면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형제의 용서 문제를 거론하고 예수께서 누가의 기록과는 다른 형태의 '종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유사한 구조이지만 서로 다른 비유를 쓰고 있다. 용서라는 교훈을 두고 보았을 때 마태복음 쪽 사례가 더욱 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은 그 목적에 있어서 마태의 것과 다르다. 여기에서는 형제의 용서를 강조하기보다는 이러한 초인적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믿음은 바로 그러한 초인적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너무도 중요한 근거이다.

첫째, 종은 쉼 없이 일해야 한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자녀의 처지와는 다르다. 만일 자녀라면 게으름을 좀 피울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밤에는 종의 시중을 받으면서 낮의 피로를 푸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종은 다르다. 종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한다.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목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된지를 설교 시간에 말하곤 한다. 새벽기도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이 다 쉬는 '안식일'에까지 고되게 일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불편하면 '종'이 되지 않으면 된다.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 중 아무도 당신에게 '주의 종'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일반 성도들이 일주일 내 직장에서 일하고 안식일조차 교회에서 봉사하느라고 쉴 틈이 없는데 반하여 많은 목사들은 주일의 힘든 노동을 이유로 월요일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다. 놀라운 일은 한국 교회의 적지 않는 목사들이 주5일제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하는 명분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라고 하셨는데 왜 5일만 일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주말이 이틀일 경우에 교인들이 산으로 들로 놀러가느라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참으로 한국 교회의 게토화를 보여주는 해괴망측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성경의 정신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오류이며, 후자는 다른 방법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경우도 자신의 자녀들이 좀 더 나은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종의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는 이철환의 '연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분은 연탄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연탄은 자기 몸을 태워 남을 덥혀 줄뿐만 아니라 자기 몸을 부숴 길을 미끄럽지 않게 한다. 종의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이다. 물론 종의 육체도 마찬가지이다.

종은 오직 주인이 쉬라고 할 때에만 쉴 수 있다. "수고했네, 이제 가서 쉬게"라는 주인의 말이 없으면 종은 묵묵히 주인이 명령한 일을 해야 한다.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서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지칭하는 자에게는 복(福)이 없다.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의 자녀'라고 지칭한다면 용납할 만하다. 자녀는 부모가 명령해도 흔히 농땡이를 부리기 마련이며, 또 사실상 그 자신도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걸 먹어야 한다.

누가복음의 비유가 강조하는 바이다. 종이 주인과 같이 먹을 수 있을까? 물론 주인이 그렇게 명령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그러나 누가의 비유는 일상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인이 먹을 음식을 차려주고 그가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수종 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바를 정리해야 하는데, 대부분 자신이 그 남은 것을 먹어치우는 방법을 택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조선조 때에 거의 종의 신분으로 봉사해야 했던 우리네 여성들이 처했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애처롭기도 하다.

종이 자녀보다 더 좋은 차를 타야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자녀보다 더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주의 종들은 가장 좋은 차를 타야 한다, 주의 종들은 가장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주의 종들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주인이 주인의 자녀들을 축복한다는 엉터리 복음이 한국 교회에 심한 악취를 풍기게 만드는 근원 중 하나다. 악취가 심하면 사람은 멀리하고 파리 떼가 들끓게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악취로 한국 교회를 구별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검소와 절제 그리고 겸손은 종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품성이다. 주인이 부자라고 해서 종이 호화로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그랜저를 탄다고 해서 종도 그랜저를 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교회가 부유하다고 해서 목사가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다. 비유컨대, 그 목사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로 간주한다면, 그래서 그 교회에서 일하는 여러 사역자 중 가르치는 일은 맡은 자로서만 간주한다면, 그 목사는 교회의 재정 규모에 맞추어 사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불렀거나 부르고 싶다면 교회 재정 규모가 어떠하든 최소의 사례로 만족해야 한다. 가장 검소한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 하며, 이러한 생활을 누리는 것만도 감사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종이 자녀와 같은 처지를 누리려 하는가?

간혹 자신의 부인을 '목사 사모님'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거나 스스로 실천하는 목사들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부인에게 높임말을 쓰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남에게 자신의 부인을 지칭할 때 높임말을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식한 덜 떨어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만 유달리 목사들이 자신의 부인을 '사모'라고 부르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더구나 '주의 종'의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종'의 부인을 주의 '자녀'들이 존경해야 한다? 이 무슨 몰상식하고도 해괴한 어법인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종은 보상을 바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도리어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해야 할 것 아니냐?'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실제로 은유 이전에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었건, 돈으로 팔렸건, 종의 몸에서 태어났건,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주인은 그를 언제든지 폐기처분할 수 있다. 종은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며 주인의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보람이다. 따라서 어느 주인도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는데 따로 칭찬할 필요가 없으며, 종도 그것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

현실적으로,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바처럼, 노예 노동은 제일 비효율적이어서 언제나 주인의 눈에 차지 않기 마련이다. 은유로 돌아오자면, 종의 노동이 주인 눈에 들기는 난망하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종은 도리어 주인의 자비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종으로 간주한다면 아무것도 주인에게 달라고 할 것이 없다. 종은 자신이 가진 것을 족한 줄 알고 그것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자신의 곤궁한 처지가 남의 탓이며 처음부터 출발이 불리했었다는 불평을 하는 자는 주의 종이 아니다. 진정한 주의 종은 언제나 모든 부족함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 자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종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우리가 종종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머슴들을 보게 된다. 이 주인의 종들은 온갖 고난을 다 행해도 결국에는 헛되이 사라질 약간의 깨달음 정도밖에 누리질 못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다정하고 자상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주인이시다. 그는 일단 종의 역량에 따라 일을 맡길 줄 아시고,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한 종에게는 놀랄 만큼 풍성한 복을 주시는 분이다. 최후적으로는 그의 자녀와 종들에게 영원한 삶과 기쁨을 골고루 베풀어주신다. 종이 주인의 뜻대로 행하기만 하면 어떤 경우에도 무엇이 모자라서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기도 하다.

진실로 '주의 종'이라는 은유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종은 쉼 없이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이 먹고 남은 걸 먹어야 한다. 그러고서도 종은 보상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으로 보상해주고자 한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므로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진실로 더 철저하게 종이 될수록 더 높은 천국 보좌를 예비해놓고 계신다. 이 비밀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되었다.

3. 종으로 오신 예수 : 케노시스

바울 사도는 그가 빌립보로 쓴 옥중 서신에서 이 비밀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 종이 되심에 관한 진술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진실로 이 시는 가장 확실하게 종이 되는 자가 가장 확실하게 주인이 된다는 비밀을 진술한 오묘한 말씀이다.

'주의 종'이 되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바로 그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다. 삼위일체의 이 신비한 교리를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는 없으나 자신을 비우셨다는 점만큼은 인간의 여러 은유로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비록 주인의 자녀이지만 자녀 됨을 기꺼이 버리고 종이 되기를 원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주의 자녀이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까지 한국 교회가 그런 대로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이유는 바로 한국 교회 내에 이처럼 진실로 주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안락보다는 주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피폐해가는 농촌의 들녘에서, 음습한 도시의 빈민굴에서, 저임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노동자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주의 종들이 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풍요하나 정신적으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병들고 피곤한 사람들을 밤낮으로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도 있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TV 화면에서, 때로는 인터넷상에서 주의 나라를 확장하기로 결심한 주의 종들도 있다. 자신의 안위보다 주님의 나라에 봉사하기를 앞세우는 모든 자마다 다 주의 종이라는 부름이 합당하다.

4. 맺는 말

주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와 구별되는 한국 교회의 우스꽝스러운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주의 종'을 목사의 고유명사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사만이 주의 종이 아니다. 아니 한국 교회에 있는 적지 않은 목사들이 주의 종이 아니다. 거기에는 주의 자녀들을 호령하는 상전으로서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주인이 돌아오실 때에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게 될 자들이다.

진심으로 주의 종이 되려는 자는 주인을 두려워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첫째, 쉼 없이 일해야 한다. 일하고 싶은 때 일하고 쉬고 싶은 때 쉬는 자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둘째, 주인이 먹고 남은 것을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검소와 절제는 종이 마땅히 보여야 할 덕목이다. 셋째, 보상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도리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였으나 여전히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겸손은 종의 본질적인 품성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주의 종임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어떻게 종으로 살 수가 있을까? 누가 감히 주의 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종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죽고 나의 생명은 이미 주인의 것이 되었다. 그가 죽으라면 죽고 그가 살라면 산다. 이 글에서 비유 상으로 주의 자녀와 주의 종이 나뉘어졌으나, 진실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종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종의 표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워 종의 몸으로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공평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만물의 지배자가 되게 하셨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낮아지는 자가 가장 높아진다는 복음의 비밀이 나타나고 있다. 루터가 정리한 바와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은 자이지만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런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 자이다.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여기는 자는 마땅히 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본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진실로 주의 종이 되는 자에게는 위로의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생과 평안을 상급으로 주시는 동시에 아름다운 면류관을 더하실 것이다.

백종국 / 경상대 정치행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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