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안수’포기한, 전직 부교역자의 희망
‘목사 안수’포기한, 전직 부교역자의 희망
  • 오병조
  • 승인 2016.01.01 0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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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내가 왜? 여긴 어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한 걸음만 내딛어도 살인적인 더위가 쏟아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땀이 주룩주룩 쏟아진다. 힘주어 움켜쥔 자재들은 원래 무겁지만, 그 무게가 더해간다. 손에 물집 없는 곳이 없다. 툭툭 터져 피가 난다. 쓰라리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닥친다. 다리는 멍투성이고 찢어졌던 곳은 피가 말라 굳어 있다. 더위를 날리려 연신 물을 들이켜지만 왜 목은 더 메말라 가는가.

오전 일이 끝나고 밥을 먹고, 눈이 감긴다. 그 자리에 기절해 40~50분 정도 잠이 든다. 뇌는 ‘계속 자라’고 말하지만, 몸은 일어나서 일을 반복한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누구나가 그렇듯이 집을 나선다.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회사에 들어서서 컴퓨터를 켜고 설계 도면들을 본다. 이해가 안 된다. 도면을 아무리 보아도, 자꾸만 보아도 구조물의 형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선은 선이요, 숫자는 그냥 숫자다. 도면만으로 구조물의 형상을 떠올려야 함에도 거듭 실패한다. 도면을 계속 보니 눈이 뻑뻑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있으려니 무기력감이 밀려온다. 그런 나를 보며 직장 상사는 살쾡이 눈을 하다가 거친 말을 쏟아낸다. 나보다 어린 친구는 내가 도면을 볼 줄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다. 그 나이 먹도록 더하기 빼기를 배우지 못했느냐는 눈빛이 분명하다.

평생 살면서 도면을 처음 봤다.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잘 돌아가지 않는 눈으로 치수 하나하나 찍어가며 설계의 기본을 배운다. 실력은 아주 눈곱만큼 늘고,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답답한 마음에 회사 옥상에 올라가 찬 공기를 마시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도면을 본다. 그러나 역시 앉아있는 자리가 답답하고 눈치가 보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러다 미쳐버릴 것 같다.

주님을 애타게 찾고 부른다. 또 부르고 또 찾는다. 주님은 묵묵부답이시다. 그리고 다시 도면을 본다. 봐야만 한다. 여기가 내 일터이니까. 가장이니까. 세 아이의 아빠니까.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아이들이 나를 반긴다. 온 동네가 떠나가게 아빠를 반긴다. 첫째와 둘째가 아빠 왔다며 소리를 지른다. 이에 질세라 셋째도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까악까악 소리를 지른다. 아내도 퇴근하는 남편을 반긴다. 아내와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다. 삶이 참 쓰라리다. 힘들다. 항상 가난에 치여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날 먹으려 주변을 맴돈다.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지금 내가 와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이 힘들고 무겁다. 주님을 찾는다. 주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시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남편이자, 아빠니까. 그리고 꿈도 있으니까. 꿈? 그래, 나에겐 꿈이 있(었)다.

 

목회자의 꿈 vs. 밥벌이

난 교회 사역자였다. 강도사 고시를 치르고 강도사 인허를 받고 목사 안수를 남겨뒀었다. 신학교 동기들이 한두 명씩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제 동기들은 거의 다 목사다. 나도 별일이 없었으면 지금은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겠지. 그런데 난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왜 꿈이었던 목회를 포기하고 욕을 먹어가며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내가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인 부분이다. 난 지금까지 우리 다섯 식구가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아내에게 한 번도 준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사명감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판단할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은 사역자가 무슨 돈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난 한 번도 다섯 명의 식구가 생활할 수 있는 생활비를 아내에게 준 적이 없고, 매달 생활비를 놓고 기도했지만 언제나 생활비 때문에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항상 고민했다. 아이들 장난감은 ‘중고나라’라는 사이트를 이용해 중고로 사줬다(‘중고나라’ 관계자 아님, 사기꾼이 많으니 조심하시길!). 아내와 나는 서로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가장으로서 이런 경험은 정말 그 누구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끼며 살았음에도 빚은 늘어갔다. 믿음이 없는 사역자여서 그런지 기도를 해도 이 부분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다자녀는 나라에서 주는 혜택이 많아서 좋겠다고들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애 셋을 낳으면 재벌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럴 땐 정말 ‘너도 한번 낳아보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웃을 뿐. 사실 나도 그런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난 정말 사명감에 불타올라 사역자가 되었는데, 교역자가 이런 쓰라린 감정을 갖는 것조차도 용서하지 않으려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았다. 밥벌이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밥벌이 생각을 하게 하는 현실이, 아팠다.

내게 딸려온 ‘옵션’, 아내

교회는 돈 문제에서 특히 불합리해진다. 사택을 책임져준다던 교회는 지방의 집을 처분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에게 느닷없이 “교회문제로 사택을 준비해줄 수 없고 대신에 사택 전세비용을 보조해준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보조’. 물론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데, 애초 나랑 했던 약속은 그게 아니었다. 난 졸지에 내 수준에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돈을 전세자금 대출로 받아야 했다.

아내를 신학교에서 만났다. 아내는 일단 예쁘고, 교회에서 남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아기자기한 사역에 달란트가 있었다. 해서 주일학교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서울 교회에 올라오면서 아내도 유치부 사역을 하기로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생활비를 주기로 하고. 막상 오니 교회 사정상 생활비를 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아내는 유치부 사역을 했다. 부교역자인 내게 딸려온 ‘옵션’이었으니까.

가족들은 또 어떤가. 교회에서 아이들끼리 뭔가 시비가 붙으면 우리 아들은 매일 지거나 포기해야만 했다. 어려서 때도 쓰고, 욕심도 부리고 제멋대로도 해야 하는데, 성도들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나는 항상 아이에게 의젓함을 강조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누구 강도사 아들이 참 천방치축이고 욕심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성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 아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거나 떼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닌데,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자기 것을 포기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모든 아이들이 “응애”하고 태어나듯 부교역자 아이들도 “응애” 하고 태어나는데, 어떤 분들은 부교역자 아이들은 “할렐루야, 아멘”하고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부교역자로 짊어져야 할 짐은 당연하게 내가 짊어지지만 우리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때 그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 같아 힘들고 속상했다. 물론 지금은 이런 풍토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고 믿고 싶다.

아내 또한 부교역자의 아내로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다. 결혼하고 나를 따라 교회를 옮긴 아내는 어느 부목사님의 사모님이 데이트를 하자고 해서 기뻐했다. 낯설고 힘들어하는 자기를 위한 사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모님과 데이트를 하고 집에 온 아내는 얼굴빛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내는 데이트를 가장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옷을 너무 화려하게 입지 마라. 화장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성도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라. 교회에서는 남편과 너무 가깝게 있지 마라. 물론 그 사모님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사실 내 아내가 예뻐서 그 사모님이 질투가 나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 지금은 아줌마가 된 그 시절의 내 아내여~).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부교역자 아내들은 스스로도 가지게 되며, 사실 성도들도 심심치 않게 “사모가~”라는 말을 내뱉는다. 꽃다운 나이 26살에 결혼한 아내는 자신의 본성을 숨긴 채 ‘부교역자 사모’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 ‘나쁜 놈’이 내가 될 것 같았다

교회 사역 중에 담임목사님 가정에 문제가 터졌다. 사모님이 문제가 생겨 집을 나가셨고, 목사님이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장로들끼리 의기투합해 목사님을 내쫓았다. 당시에 난 담임목사님을 약자로 생각했고, 장로들이 권력을 부리는 게 싫었다. 난 절망에 빠진 담임목사님과 함께 개척을 하기로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여전도사님을 설득해 셋이 힘을 모아 개척할 수 있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목사님은 본인을 따르던 몇몇 성도들과 함께 개척에 동참했던 여전도사님을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본인도 이혼을 하고, 여전도사도 이혼을 해서 교회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불편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전도사님을 다른 교회에 가라고 종용하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말했지만 내 말은 단칼에 무시당했다. 난 그 길로 사역을 포기하고 교회를 나왔다.

 

너무 힘들었다. 내가 경험한 부교역자의 삶이 너무 쓰라렸다. 내가 어린 시절 꿈꿨던 사역자의 삶이 아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함께 있어주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동행하고, 위로하고, 그러면서 나도 위로받으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교회들은 오히려 권력을 지향하고, 성도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그 노예적 상태에 만족을 누리며 살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 성공하는 목회자라고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었다.

부교역자 10년 차, 제도교회에서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답답했다. 교회가 싫어졌다. 그렇게 정말 죽도록 교회에서 일하고 내 모든 젊음을 바쳤는데, 뭔가 마음이 아렸다. 부교역자들을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소모품으로 여기는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나와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전하지만, 옆 사람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입히면 금세 돌변하여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들. 이런 것들이 자칭 다 성경이 기준이라니 참 성경이 신비하고 오묘하지 않은가.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방하지만 사실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닐까. 자기를 위해서 남을 사랑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성도들의 모습들을 보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랑을 표방하는 거짓 사랑이 싫었다.

안 그런 분들이 분명히 훨씬 많지만, 점점 더 이상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들이 많아지고 있다. 성경을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교회 내에서의 권력자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게 착취가 일어나고 힘없는 사람들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내 성격상 내가 그 착취에 가장 앞장설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놈이 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포기하고 다른 일터로 나왔다.

‘쯧쯧쯧…’

지금 일터에서 성도들의 삶을 경험한다. 윗사람의 갈굼 앞에서 성도들의 비굴함을 경험한다. 실력으로 치고 올라오는 아랫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성도들의 두려움을 경험한다. 실적과 싸우며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조바심을 경험한다. 한 달 죽도록 일해서 최저생계비를 받아가는 성도들의 절망을 경험한다. 고된 노동으로 체력적 영적 한계를 느끼는 성도들의 빈곤을 경험한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계속되는 그분의 묵묵부답으로 영적 고갈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의심을 경험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친절, 사랑, 배려로 살고자 애쓰나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비웃음, 뒷담화인 성도들의 삶을 경험한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싶어도,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삶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의 핍진함을 경험한다.

삶이 팍팍하고 힘들다. 그러나 말로만 성도의 자리를 이야기하는 사역자가 아닌, 성도의 삶을 살며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삶이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해줄 수 있는 능력도 안 되지만, 그들과 함께 예배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닐까?

힘든 나날들을 함께 견뎌주며 살아주는 아내가 내일도 밥은 해주겠지? 여전히 어떤 상황에서도 날 보고 웃어주고 소리 질러주는 내 새끼들이 내일도 날 보고 소리 질러 주겠지? 빨리 교회에 다시 들어가라고 등짝 스파이크를 때리시는 엄마도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겠지? 요즘 내 삶을 보고 혀를 ‘쯧쯧쯧’ 차며 5만 원씩 보내주는 동기 목사님은 또 돈을 보내주면서 여전히 혀를 차겠지? 아~ 나를 향한 관심들, 이 또한 하나님의 관심일터, 살만하다. 삼시세끼 밥 먹고 힘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꿈을 찾을 수 있겠지?

링크: <복음과상황> 기사원문 보기

오병조 / 광신대학원을 졸업했다. 강도사로 사역하던 중 사역자로 사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회의감을 느끼고 그만 뒀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다둥이 아빠이다.

본 글은 <복음과상황> 302호 커버스토리에 실린 글을 함께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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