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시장, 희망의 사람 차인홍을 소개하다
전직 시장, 희망의 사람 차인홍을 소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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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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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염홍철 전 대전시장의 아침 편지

염홍철 전 대전시장이 매주 월요일마다 보내는 아침 편지에 차인홍 교수를 소개했다. 차인홍 교수는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음대 교수에 임용된 바이올리니스트 겸 마에스트로가 되어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 기독교인이다. 염홍철 전 시장의 허락을 받고 원문을 올린다. <편집자 주>

지난주 월요 편지에는 공고 기계과 졸업이 최종 학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경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세계적인 건축가 반열에 오른 일본의 안도 다다오의 이야기를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에 못잖은 기적을 만들어 낸 휠체어 장애인인 차인홍 교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대전의 특수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만 이수하였으나 현재 미국 음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9살이 되던 해에 대전의 ‘성세재활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유명 바이올리니스트가 우연히 재활원 앞을 지나가다가 목발을 짚거나 땅바닥을 맨몸으로 구르며 천진하게 놀고 있는 장애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을 한 계기로 차인홍 교수는 바이올린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그때까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알지 못했고, 어떤 음악도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악기 소리에 매료돼 연습에 몰입하였습니다. 차인홍 교수는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이 동기가 되어 바이올린 연습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바이올린 소리가 좋았고, 그 악기가 내 손에 맞았으며, 그 소리 속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이올린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재활원에서 기술연수생을 선발해 일본에 보내기로 했는데 당시 16세였던 차인홍 소년이 낙점된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1년간 연수기간 중 목공소에서 6개월, 인쇄소에서 6개월 동안 일을 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에 비해 장애인 시설이 월등히 좋았던 일본생활은 차인홍 소년에게 신세계였습니다. 특히 놀란 것은 장애인을 위한 운동시설이었습니다. 2살 때 소아마비가 되어 운동을 해 본 경험이 없었던 그는 좋은 시설에서 마음껏 운동을 했습니다. 퇴근 후 체육관에 가서 밤 11시까지 농구, 탁구, 양궁에 이르기까지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운동은 모두 섭렵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운동 신경이 발달했으며,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연습과 훈련 6개월 만에 급기야 일본에서 열리는 아세아태평양지역 장애인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여 휠체어장애물경기, 800미터 달리기, 소프트볼 던지기에서 각각 금, 은, 동메달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는데 이는 누가보아도 초인적인 성과물이었습니다.

1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 후 일본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줄 리 만무했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날 갑자기 지역의 한 음악가가 찾아와 그에게 재활원 출신 아이들 4명으로 현악 4중주단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베데스다 4중주단’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연습장소가 없이 각각 방과 부엌, 마당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의 연습을 소화하였고 상당한 실력을 쌓아 연주회도 여러 번 하였으나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되다가 결국 베데스다 4중주단 활동을 계기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의 신시네티 음대 학생모집에서 실기 시험은 합격했고, 차 교수의 회고로는 대학 입학은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예전에 ‘그냥 봐 놓은’ 대입검정고시로 학력도 인정받았습니다. 또 유학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경제적인 고통이 따랐지만 그때마다 우연찮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잠시 귀국하여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83 대 1의 경쟁을 뚫고 현 소속인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학 바이올린 교수로 채용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지금은 그 대학의 종신교수로서 강의에 열중하고 있으며 방학이 되면 연주회뿐만 아니라 교회 간증과 선교여행, 장애인 음악회 등의 일정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 전역을 돌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차인홍 교수는 오늘이 있기까지 “그 누군가가 나의 앞뒤, 좌우에서 나와 함께 계셨기에 내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누군가 꿈을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세계 곳곳의 장애인 아이들이 모여 곳곳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그곳에서 그들이 마에스트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연주함으로써 아름다운 앙상블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제가 임명직 시장 때인 1993~5년경 대전시립교향악단에서 차인홍 악장을 처음 만난 이후 오랜만에 잠시 귀국한 차 교수를 다시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동적인 생애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디, 그의 앞길에 그리고 이 땅 모든 장애인들의 앞길에도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염홍철 / 전 대전시장, 염홍철의 아침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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