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 장준식
  • 승인 2016.01.24 10:0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은 혁명이라 할 만큼 많은 것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디지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한병철 교수는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시대의 병폐를 논하며 이런 말을 한다.

"땅, 신, 진리는 농부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냥꾼이다. 정보의 사냥꾼들은 먹이를 찾아 디지털 사냥터인 인터넷을 쏘다니고 있다. 농부와는 반대로 사냥꾼은 이동성을 지닌다. 그에겐 정착하도록 강제하는 경작지가 없다. 그들은 거주하지 않는다"(171쪽).

이러한 정보사회, 디지털 사회, 즉 '투명사회'를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주의하지 않으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정보의 사냥꾼들'로 전락하기 쉽다. 사실, 그러한 일들이 이미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 개신교회 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의 설교는 '정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느새 '정보'로 변모한 듯 하다. 이것은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선택된 디지털 매체가 복음의 내용을 바꾼 듯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먀샬 맥루한이 말한 "매체가 곧 메시지다"의 실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병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과 정신이 없다. 기독교인이 디지털 무리에 속하는 순간 그들은 영혼과 정신이 없는 '정보'만 습득하게 되는 데, 이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접하게 되는 '설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디지털 매체 속의 설교자가 하는 설교는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설교자와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설교를 자기의 삶에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한 '자유'를 맛본 디지털 무리 속의 기독교인은 자기 입맛에 맞는 '먹잇감(설교)'을 찾아 인터넷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변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열매는 정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쌓아야만 얻어지는 지식'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기본적으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이 땅에 두발 딛고 살며 신과 진리를 찾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더욱더 농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교회는 그의 경작지이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에 오래도록 머무르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인 교회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한 교회에 오래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다 주는 '사냥꾼 되기의 습성'에서 벗어나 농사 짓듯이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며 그 복음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농부가 되기보다 사냥꾼이 되려는 습성이 강하다.

어떻게 이러한 습성에서 벗어나 '농부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목회자의 설교 듣기를 지양하는 일이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인격이다. 복음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째로 바꾸게 하는 능력(transformation)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지, 그분의 '말'만 듣는 일이 아니다. <투명사회>에서 말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디지털 매체, 특별히 인터넷에는 '시선'이 없다. 일방적 '관음적인 태도' 밖에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물든 사냥꾼 같은 교인은 설교가 나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떠나고, 신선한 정보가 없으면 떠나고, 스타일이 자기와 안 맞으면 떠난다. 디지털을 통해 접하는 설교에는 함께 머무르는 시선이 없다.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눈과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해주는 '외설적 정보'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복음을 정보로만 접하면 '행함이 없는' 신앙인이 되기 십상이다.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설교 중심의 예배를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다. 성례전이 가지는 일차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받는 일에는 '참여'가 필수 요소이다. 성례전은 곧 참여이다. 물론 설교학자 메어리 힐커트 같이 설교를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설교(말씀)와 성례전을 구분 짓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지 몰라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설교는 기본적으로 참여의 요소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 참석자들은 설교 시간에 목사의 일방적인 선포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은혜 되는 말(?)'에 그저 '아멘' 정도로 화답하는 것이 참여를 이룬다.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이유는 성례전은 기본적으로 '머무름'과 '거리 두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정보'와 '재미'와 '감동에서 떠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기억(anamnesis)에 머무르게' 한다. 사냥꾼은 이동하지만, 농부는 머무른다. 사냥꾼은 먹잇감(열매)을 즉시 보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한다. 사냥꾼은 먹잇감을 찾아 떠돌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하며 그 상상 안에서 오래 참고 견딘다(참여한다).

인터넷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허물어 그들 간에 '친밀성'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출시켜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를 만든다고 한병철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76쪽).

인터넷을 통해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를 듣는 것과, '제의와 예식의 객관적 기호들'과 '참여'가 없는 예배는 결국 나르시시즘만 가득한 교인을 만들 뿐이다. 성례전은 '적극적인 참여(머무름)'인 동시에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75쪽). 성례전은 개인의 주관적 심리상태와는 상관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머무르게 하며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친밀성을 가장해서 '머무름'과 '거리 두기'를 제거해 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성례전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더욱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는 편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리품 팔아 '복음'을 들으러 가야 하는 수고 없이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내 입에 딱 맞는 말씀을 편리하게 골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이, 농부로 태어난 우리가 어느새 '먹잇감'을 찾아 이러저리 쏘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간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이다. 복음은 경작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씨를 뿌려 경작해야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사냥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내 입에 맞는 '먹잇감' 고르듯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의 설교는 가능한 한 멀리 하자. 그리고 '하나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나' 사이에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적극적인 참여를 갈망케 하는 성례전적인 예배를 세워나가자.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농부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장준식 목사 (미동남부지방 컬럼버스감리교회) / <당당뉴스>
본지 제휴, 무단전제 및 배포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미서부 교포 교인 2016-01-25 04:05:10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만.. 평신도들이 얼마나 메말라하는지 전혀 모르시는군요. 나르시시즘, 사냥꾼. 저같은 교포교인들에게는 넘볼수없는 사치인 현실을 대부분 목사님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못하봅니다.. 그러니 암담합니다.. 아십니까? 많은 한인 교회 중에 불량식품 전하지 않는 목사님이 계신 교회를 찾으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야한다는 걸. 그러니 어쩝니까? 굶을까요? 아니면 큐티만?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