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없는 목사
친구가 없는 목사
  • 이계선
  • 승인 2016.03.20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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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돌섬의 아침 태양을 만나러 가는 남자들

버지니아 숲 속에 사는 해암(박평일)이 차를 몰고 올라왔다. 지난해 <예수쟁이 김삿갓> 출판 잔치 때 만난 뉴욕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금강산(식당)으로 달려왔다.

"여남은 명이 만나 밥 먹고 얘기하다 헤어지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스물세 명이나 나와 주셔서 야단났습니다. 너무 많이 모여 순서가 없으면 무질서하고 답답하게 됐으니까요. 자, 이제부터 즉석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장기자랑으로 웃음꽃을 만들어주세요"

자기소개가 끝나자 해암이 마이크를 잡았다. '기다리는 마음'을 팝송 스타일로 불렀다. 앙코르로 팝송. 영어를 잘해서 그런지 팝송이 더 좋았다. 지상 김길홍 목사가 복음성가 '거기 너 있었는가'를 불렀다. 내 아내 이현자가 여성 대표로 뽑혀 마이크를 잡았다.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와 '동백 아가씨'를 열창했다. 동백 아가씨가 돋보였다.

여고 시절 이미자의 노래를 하도 잘 불러 별명이 '이미자 동생 이현자'였다나? 들어보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미자보다 목소리가 굵고 큰 데다 약간 클래식 스타일로 들려서 좋았다.

"동백 아가씨는 코맹맹이로 불러야 제맛인데 그러면 이미자의 모창 같아서 비음을 뺐어요."

우리 부부는 동백 아가씨와 연분이 있다. 아내는 동백 아가씨를 한 곡 부르고 천 달러를 받은 적이 있다. 난 '동백 아가씨를 노래하는 목사'라는 유고 문집을 써주고 5천 달러를 벌었다.

강석휘(82세) 옹이 냄비를 쓰고 나와 '이민 아리랑'을 발표했다. 냄비 장단에 맞춰 춤과 노래와 만담으로 엮어지는 유랑극장 이민 아리랑.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김포공항 747 이민 여객기." 

그렇게 김포공항을 떠나온 이민자는 이민의 땅 뉴욕 뒷골목을 헤매면서 복수의 탄식 '딜라이나'를 노래한다. "어두운 골목길 후러싱 거리를 헤맬 때 와이 와이 왜 왔나?" 한 시간짜리 코미디를 잠깐 맛 뵈기로 보여줬는데도 즐거웠다.

이어서 성악가 서병선 테너의 목소리로 '고향 생각'이 울려 퍼졌다. '고향 생각'과 '은발'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서병선의 명창이다. 최정자 시인의 시낭송이 끝나자 다 같이 일어나 손을 잡고 '만남'을 불렀다. 만날 적마다 부르는 우리들의 폐회송 만남.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이었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즉석에서 꾸며본 엔터테인먼트가 그럴듯했다. 가곡 성가 가요 팝송 코미디 시가 있는 돌섬스타일의 열린 문학회였으니까. 누가 한마디를 했다.

"뉴욕커들은 프로 선수들이야. 준비 없이도 즉석 무대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다니!"

"이제 헤어지는 시간입니다. 혹시 갈 데가 없는 분(?)은 돌섬으로 갑시다."

해암 박평일, 송하 김상옥 부부 3인이 우리 부부를 따라 돌섬으로 차를 몰았다. 송하는 해암의 서울대 1년 선배로 형제처럼 지내는 아프리카 은퇴 선교사다. 돌섬에 도착하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120가 던킨 집을 찾았다. 포구(灣) 안에 몰래 숨어있는 아름다운 커피집이다. 물 건너 북쪽으로 맨해튼의 저녁나절이 희미하게 보였다. 

엠파이어 빌딩을 멀리 바라보면서 헤이즐넛 커피를 마셨다. 보스턴 크림 도너츠를 안주 삼아가며. 커피 향에 취한 5인은 베이(灣)가 아닌 오션(바다)쪽으로 가서 비치를 걸었다. 돌섬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고 가야지.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돌섬(Far Rockaway)은 북쪽은 자마이카 베이(灣)요 남쪽은 대서양(바다)이다. 해변이 어두워 오자 우리는 둥지를 찾아 아파트로 돌아왔다.

밤 깊도록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5인의 지난 이야기들이 유랑극단의 레퍼토리처럼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풀어낼수록 끝없이 이어지는 노변야화(爐邊夜話). 그러다 답답하면 밖으로 나가 어둠의 거리를 걸었다. 70 넘은 5인의 남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처럼 즐거웠다.

"취침 시간입니다. 2명이 자는 원 베드룸 시영 아파트에 5명이 자려면 고생나 해야 해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과 생활했던 김상옥 목사가 말했다.

"제가 함석헌 선생님 댁과 김재준 목사님 댁에서 잠을 잔 적이 있습니다. 청와대 영빈관을 벌벌 떨게 했던 천하의 장공 김재준 박사 댁의 방이 꼭 등촌 이 목사님 방만 했어요"

 

남자들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눈을 떠보니 해암이 새벽 바다로 출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 몰래 남자들 셋이서 바다로 나갔다. 10분을 걷자 새벽 파도가 철거리며 나타났다.

돌섬 산책길은 두 가지 코스. 파도를 따라 모래를 밟고 걸어가는 30리 백사장. 그리고 백사장을 따라 나무와 시멘트로 만든 보드워크 걷기.

우리는 보드워크를 가로질러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어둠을 헤치고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와! 태양이다.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면서 물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붉은 불덩어리였다. 커다란 황금 덩어리였다. 황금보다 값지고 아름다운 생명 덩어리였다. 그래서 태양 빛이 닿는 곳에 꽃과 새와 과일이 생성된다. 그 태양을 새벽에 보는 것이다. 새벽에 보는 태양은 창세기의 태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조와 생명의 태양. 누가 박두진의 시를 읊조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태양이 떠오르자 사방이 밝아왔다. 보드워크위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로 안개꽃밭이 생겨나고 있었다. 돌섬 밤바다는 밤새 안개로 덮인다. 해가 떠오르면 안개는 모래 위로 밀려나다가 보드워크로 올라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숨어버린다. 그래서 30리 보드워크가 안개꽃으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새벽 보드워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안개꽃을 입고 은하수를 걷고 있는 것처럼 멋져 보인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 곧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헤르만 헤세의 '안개'가 생각난다.

안개속 에서

-헤르만 헤세-

이상하여라! 안개속을 걷고 있으면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이상하여라! 안개속을 헤매고 있으면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우리는 발목이 시도록 돌섬의 아침 바다를 걸었다. 40가 던킨 집에 들러 보스턴 크림 도너츠에 헤이즐넛 커피를 들었다. 몇 시간 후에 그들은 돌섬을 떠날 것이다. 나는 친구가 없는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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