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를 향한 합기도 사범 예수
권력자를 향한 합기도 사범 예수
  • 지성수
  • 승인 2016.04.03 03:5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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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 (7)

예수가 합기도(방어 위주의 호신술)를 가르치셨다는 것을 아시는가?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시오. 당신을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마저 내어 주시오.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 (마5:39-42)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마저 돌려대라." 

예수 합기도의 기본 기술이다. 때리는 것도 기술이지만 맞는 것도 기술이다. 권투 시합할 때 보면 선수가 주먹을 얼굴 앞에 들고 싸운다. 왜냐하면 되도록 얼굴을 덜 맞으려고 하는 방법이다. 맞을 때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을까? 덜 아플까? 덜 맞을까? 등등이 다 기술에 속하는 문제다. 

전혀 저항할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매를 맞을 때 때리는 놈이 오른뺨을 때리면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빨리 얼굴을 다시 돌려서 왼뺨을 대지 않으면 잘못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다. 호신술의 경지에서 보면 두 손으로 사람을 때릴 때는 구태여 왼뺨을 들이 댈 필요가 없다. 양손으로 식성대로 때리면 되니까. 

그런데 오른쪽 맞고 왼쪽을 맞으려고 뺨을 돌려대는 경우는 내 쪽이 묶여 있든지 아니면 전혀 저항할 수 없는 권위 앞에 상대방이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상대편이 한 손으로 때릴 때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럴 때 오른뺨을 때린 후 왼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리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을 대라는 말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하게 될 때 꾹 눌러 참는 것이 한 대라도 덜 맞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호신술을 넘어서 한 대라도 덜 맞는 처세술이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시는가? 2인 1조로 한번 직접 해보시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위의 성경 구절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네 가지의 이야기가 밑에서부터 점차 그 요구가 더 강해져서 억압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준다. 처음에 꾸어 달라고 하는 청에서 함께 가자는 강요를 거쳐 재판을 걸겠다는 협박을 하고 나중에는 뺨을 때리는 폭력으로 점점 억압이 고조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범죄자가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듯이 신변의 위협이 점점 높아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가 이야기한 위의 네 가지 경우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당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실재적인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제일 강제성이 약한 네 번째 경우인 돈을 꾸어 달라고 하는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고대 동방에서는 구걸하는 거지들 때문에 성가실 지경이었다. 소수를 빼고서 대부분의 국민의 아르바이트가 구걸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처럼.

거지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졸라대는 것은 물론 기분이 썩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염치없이 조르더라도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를 보자. 징용, 징발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일제 강점기 때, 6,25 기간에 많이 있었던 일이다. 

평화 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한번 겪어 보았다. 1971년 도에 국회의원 비서를 하고 있을 때 연말에 지역구에 달력을 돌리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1장에 일 년 12달이 다 나와 있는 달력이 농촌 지역에서는 아직도 많이 쓰일 때였다. 시골의 집집마다 벽에 국회의원의 사진이 크게 나와 있고 글씨는 조그만 달력이 붙어 있었다.

검문소 앞을 지나는데 육군 중사 한 명이 나오더니 "가까운 곳에 간첩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협조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하더니 무조건 올라타는 것이었다. 조금 가다가 마을에서 기다리던 예비군을 두 명 더 태우고 근처에 산으로 가자고 했다. 내 입장은 빨리 달력을 돌리고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지만 도저히 거절할 상황이 아니고 거절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수 당시 길을 가다가 로마군에게 재수 없이 물건을 지고 가라고 강제징벌을 당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안 가겠다고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닐 것이다. 할 수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경우인데 5리를 끌려간 다음에 인상 쓰다가 트집이 잡혀 한 대 맞고 5리를 더 끌려가기 전에 자진해서 10리를 가라는 말이다. 

두 번째 경우는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이라는 그것밖에 없는 한 벌 옷을 빼앗길 처지이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추운 밤에 겉옷을 이불을 삼아야 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겉옷은 빼앗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 사이에서는 겉옷을 빼앗길 염려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민족인 로마군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치사하니까 까짓것 겉옷까지 주어 버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경우는 위에서 예를 들었다. 흔히 기독교윤리를 말할 때 '관용의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거 정말 웃기고 자빠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약자가 강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게 말이 되나? 이런 것을 보고 시쳇말로 '빙신 육갑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종종 '병신, 쪼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에 괜히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당시의 상황은 세계적인 군사 강국 로마에 복속된 변방 식민지 팔레스틴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과연 누구를 상대로 이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이 말을 한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리떼가 들끓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양 같은 처지인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방법 즉, 상대방은 가지지 못한 도덕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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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성도 2016-04-27 21:04:30
"성숙한 성도 건강한 교회"가 희망인데 정이철은 왜 "불순한 성도, 병든 교회를" 지향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정이철은 "바른 믿음"이란 사이트에서 거짓과 모함 인신공격으로 자신의 감정을 갖고 도배하고 있는데 달라스윌라드가 말한 예수의 피만 빨아먹는 "벰파이어"같은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른쪽돌려왼뺨 2016-04-27 16:06:00
나름 재미있는 해석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