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이 맞아야지
균형이 맞아야지
  • 지성수
  • 승인 2016.04.12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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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 (8)

우리는 지금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 두 개의 세상을 살고 있다. 온라인에서 만난 인연은 가벼우려면 한 없이 가벼울 수 있다. 왜냐하면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벼운 인연을 소중하게 바꿔가는 건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어낸 작용이라는 것은 같다. 온라인이라고 해서 삼라만상이 움직이는 원리와 다를 것이 없다. 어떤 인연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요즘 온라인에서 만난, 정확하게는 페이스북 친구인 어느 70 대 여성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5,000만 한국인 중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삶을 산 이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나 업적을 이룬 이야기가 아니고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치 타임캡슐에 보관할만한 독특한 이야기이다. 그녀에게는 냉정한 아버지 같은 나라 한국, 따뜻한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 전생에 살았던 것 같은 그리스 3 나라의 삶이 있다.

이제까지 3 사람의 자서전을 써 준 경험이 있지만 이번의 경우는 본인은 쓰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쓰자고 했다. 자서전을 쓸 때는 집필을 맡긴 이들이 제공하는 재료를 가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평범할 수 있는 일상의 사건이지만 왜 그랬어야 하는지 어떤 원인이 결과를 가져왔는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현재 10포인트로 A4 용지 32장 정도 썼는데 50장 정도로 완성할 생각이다.

키워드는 '인격과 신앙의 균형'이다. 균형을 잃은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과 균형 잡힌 인격이 얼어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자신의 균형 잃은 신앙은 삶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녀를 구원한 것이 있다면 신앙이 아니라 균형잡힌 인격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신앙은 삶을 파괴해도 인격은 삶을 건설했다.

인격이 그 사람을 삶을 만든다. 돈, 기술, 가문, 학력 이 모든 것들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인격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최근에 땅콩 리턴 사건을 일으킨 조현아에게서 잘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조현아의 인격이 KAL 경영에 미친 숫자는 천문학적이었다.

잘 알다시피 췌장암에 걸리면 끝장이다. 취장에서 나오는 담즙은 적지만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학에서는 몸의 고장이 난 부분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하는 것에 비해서 한방에서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방식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다.

불균형 상태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이것은 씨소우를 타는 것과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유치원이라는 곳은 부잣집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동네에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있었고 마당에는 씨소우가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도 타고 싶어서 초등학교 4, 5 학년이 되었어도 수녀들 몰래 들어가서 씨소우를 타고는 했었다.

나는 예수가 가르친 것이 삶에서 균형을 잡는 법이라고 생각한다.영원과 순간의 균형, 영혼과 육체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균형,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균형, 예수는 이런 것들을 보여주었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비중을 차지할 수 없지만 한 쪽이 없이는 균형을 맞출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한 쪽으로 완벽하게 기울진체 고정되어 작동불능이 씨소우처럼 되게 만든다. 왜냐하면 다수 쪽이 땅바닥에서 발을 굴러야 씨소우가 다시 올라갈 터인데 “여기가 좋사오니.. ” 하고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할 때 너무 좋고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귀한 복음을 타인에게 전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은 순수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금메달은 당연히 여호와 증인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다.

나는 평생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수 없이 여호와 증인들의 방문을 받아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당해 보았다.'라고 해야 맞을 거다. 왜냐하면 예고 없고 동의 없는 방문이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때마다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거나, 화장실에 있거나, 식사 중이거나, 손님이 있거나, 전화 통화 중이거나, 무엇인가 하고 있을 때여서 사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 분들과 한 번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이 없다. 아마 그것은 전적으로 그 분들 탓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거나 이야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심심하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내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억지로 시간을 낸다면 그 분들과 대화할 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만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신앙을 무시 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기 때문이다.

교리가 간단할수록 생활이 율법적이 되게 마련이다.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처럼 미국인들이 만든 신흥종교나 무슬림은 단순한 몇 가지 교리만 지키면 자신이 훌륭한 신자라고 자부심을 갖게 만든다. 반면에 교리(교리라고 할 수도 없지만)가 복잡한 불교에서는 ‘나는 훌륭한 불교 신자이다.’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

내 아들, 며느리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내가 일반 목회를 할 때는 별 수 없이 주일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소위 길거리 목회로 나서고서는 반드시 소속된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런 결과이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하는 학교의 주입식 교육보다 더 주입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육을 찬성하지 않았다. 단편적이고 편파적인 성경지식을 어렸을 적부터 주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균형 잡힌 사고를 결여한 단세포 동물처럼 될 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이런 지식은 오히려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암호를 푸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종교를 잘못 배우면 오히려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한 쪽으로 철저하게 기울어져 정상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한계가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게 되고 인류, 자연, 역사의 문제에 대한 관심까지 가지 못하는 '유아론적' 단계에 머믈게 된다.

아이들은 마땅히 유치해야 한다. 그래서 유치원이 아닌가? 그러나 아이들이 어른 같이 놀면 왠지 징그럽다. 반대로 어른이 아이같이 놀면 유치하다.

유치한 단계인 '예수를 영접하는 것', '천국을 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인류와 자연과 역사에 닥친 위기가 보일 리가 없는 것이고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과 함께 아파하고 실천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편의점 보다도 더 편의주의적이고 유치원 보다도 더 유아론적이다.

'믿음'에 '이성(理性)'이 빠져 있다 보니 시종일관 '감각적-감상적'으로 울부짖으며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균형을 잃은 이런 치우친 현상은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드니 대학에서도 근본주의 성격의 선교단체가 신입생 환영식 때 캠퍼스 잔디밭에 수많은 십자가를 꽂아 놓은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급기야는 학생회에서 캠퍼스를 특정 종교 선전장으로 삼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학교당국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흉측스런 십자가 도배 사진이 대서특필 되어 보수주의들의 공격적 전도 방법이 늘 그렇듯이 그 선교단체는 마이너스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즉 한 명을 구원하고 두 명을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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